(62)|한약재 두충 가꿔 일본에까지 수출|청원군 남이면 양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중국의 호북성이 원산지인 두충은 예부터 한방의 귀한 약재로 꼽혀온 다년생 식물.
우리 나라에선 충북 청원군 남이면 양촌리 일대 30여만평의 야산이 시배지이자 전국 최대 집단 재배지이다.
중국의 『본초강목』 『대관본초』 『관대중약학』이나 우리 나라의 의서 『동의보감』에 실린 두충의 약효는 고혈압, 간과 신장 기능 촉진, 임산부의 산전 산후 보신 등에 탁월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두충 이외에 은충·은선·목면·옥사피·원두충·당두충 등 여러 가지로 불리며, 그 명칭에는 나름대로 유래를 갖고 있다.
흔히 불리는 두충은 옛날 두충이란 사람이 허리가 아플 때 이를 달여먹고 나았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며 이를 먹고 도를 터득했다 하여 은선, 껍질에서 명주 같은 실이 나온다해서 목면으로 불린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문종 때 송에서 수입해 왔고 두충나무를 들여온 것은 불과 50여년 전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임업 시험장의 일본인 시험장장이 중국 사천 지방에서 묘목 15그루를 가져와 서울에 7그루를 심고 8그루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지금 서울 홍릉 임업 시험장에 뿌리 내린 3그루가 바로 당시 중국에서 처음 건너온 두충의 원조.
이 두충이 지금에 와서 양촌리를 두충 마을로 만들게 된데는 당시 임업 시험장에 근무하던 이 마을 출신 한태현씨 (68)의 노력 때문이다.
『그당시 30원 월급이면 굉장한 대우였지요. 어느 날 일본인 책임자가 함북 무산으로 전근을 가라는 거예요. 그곳은 마적들이 들끓는 곳이라 못 가겠다며 사표를 던지고 고향 양촌리로 내려왔읍니다.』
한씨는 6·25동란이 끝난 1955년 임업 시험장의 「나무 할아버지」였던 김이만씨 (81)가 중국의 약재 나무인 두충을 심어 보라고 권유해 씨를 받아다 뿌린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지금 이 마을엔 그때 씨를 뿌린 25년생 두충나무가 지름 30cm, 높이 20여m로 자라 마을의 두충 재배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마을에서 두충이 재배되기 전에는 홍콩·대만 등지에서 약효도 별로 없는 본두충 따위를 밀수입해 왔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읍니다.』
한씨는 요즘은 일본에 연간 2t (1억원 상당) 정도씩 수출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마을의 연관 노동력으로 가구당 소득이 3백여만원을 넘게 되었다고 한다.
잎에서 뿌리에 이르기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두충은 열매가 15%, 뿌리 12%, 수피가 6.5%, 잎이 2∼3%의 약효를 갖고 있으며 잎을 원료로 한 두충차는 77년 개발됐다.
열매는 10년생 한 그루에서 한홉 정도 따고 껍질은 7∼8년이 지나야 벗길 수 있다.
두충 껍질 채취는 1년 중 나무의 가지 끝까지 물이 오른 6월 한달.
나무를 베어내 껍질을 벗긴다. 벗긴 껍질은 두충잎 속에 넣어 갈색 물을 들인 뒤 송판 사이에 끼어 편피로 만든다.
두충 편피는 1근에 2만∼3만원으로, 인삼이 한근에 8만원 정도이고 보면 한약재로는 고가에 속한다.
두충차는 6월 이후부터 단풍이 들기 전 잎을 따 그늘에서 이틀을 말린 뒤 쪄서 볶아 가루로 낸다. 꿀에 타서 마시는 인스턴트와 홍차처럼 우려내는 두 가지가 있으나 청주 시내와 토산품점 외에선 구하기가 힘들만큼 물량이 달린다.
내국인보다 두충의 효험을 잘 아는 홍콩·대만·일본 등 동남아 관광객들이 주로 사가지만 요즘은 국내에서도 그 맛을 한번 알고 난 고객들의 주문이 쏟아진다.
이 마을에서 지난해 시중에 두충차를 처음 내놓았을 때는 연 7천여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나 최근엔 연간 1억2천여만원 어치가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배수만 잘되면 어느 곳에서나 식재가 가능하고 병충해가 거의 없어 키우기가 쉽다는 두충은 양촌리에서 시작, 지금은 남한 곳곳에서 재배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마을은 돈을 벌었다는 것보다 눈여겨보지 않던 약재를 전국에 퍼뜨렸고 질 좋은 한약재의 국내 재배로 귀한 외화를 절약했다는 긍지가 있읍니다.』
두충 농원에서 일하는 김우신씨 (33)는 탐스런 두충 묘목 잎을 애정의 눈길로 쓰다듬었다. <청원=전채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