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과 치마 바람은 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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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며칠전 국민학교 2학년짜리 큰딸애가 선생님이 주시더라며 가정통신문 하나를 들고 왔다.
매우 딱딱한 문체로 되어있는 그 가정통신을 요약하면 ▲선생님에 대한 금품행위는 물론 ▲특정인물 편애해 달라는 부탁이나 ▲그 밖의 간섭 따위는 일체 배격하니 그대로 따라 달라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치맛바람 금지령이었는데, 학교로부터 이런부탁을 받고 보니 그 속사정과 함께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서너달전 이야기다.
마당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는데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음산해지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큰아이는 마침 아침반이라 집에 돌아와 있어 다행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이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전부터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아이 우산을 가지고 가는 길에 선생님 것까지 꼭 준비하곤 했는데 하교 후에 비가 쏟아지긴 처음이었다.
비를 주르르 맞고 가실 선생님 모습이 어른거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난감하기만 해 아이들에게 싸우지 말고 집 잘 보라고 이르고는 우산을 들고 빗속을 뛰었다.
그새 퇴근하셨을까 가슴을 죄며 학교에 도착해보니 선생님은 마침 하늘을 보며 걱정하고 계셨다.
건네 드리는 우산을 받으며 중년의 여선생님은 20년 동안 교편을 잡았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눈물을 글썽거려 나를 오히려 송구스럽게 했다.
바지는 흙탕물에 젖어 축축하고 신발이 철벅거려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치맛바람 금지령을 받아들고 불현듯 몇달전의 흐뭇한 기억을 되새겨 본 것은 학교와 부모사이에 낯뜨거운 통신문이 오갈 정도로 심각해진 극성모성 속에 나의 우산 건도 포함될 것인가 궁금해서다.
김치가 맛있게 익거나 특별히 떡이라도 찌는 날이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 한접시에 먹음직스런 새빨간 김치를 정갈하게 곁들여 선생님을 모시고 싶지만 아이들아빠는 그것도 치맛바람이라고 놀려댄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주름살 하나하나가 다 내 자식이 속썩여드린 흔적인 것만 같아 무엇인가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 과연 치맛바람으로 몰아 붙여져야 할 것인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70명이 넘게 몰아넣은 콩나물교실에서 분필 가루를 마셔대며, 목이 터져라고 내 자식을 가르치는 스승의 고충을 엄마들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근엄하고 정직하시기로 이름난 우리 큰아이학교 교장선생님도 비올 때 우산 씌워드리는 것만큼은 허용해 주시길 바라면서「치맛바람」과「선생님께 드리는 정성」이 구별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서울 도봉구 창동655의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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