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최고야…(59)|백년 전 모습 그대로…「투막집촌」-울릉군 북면 나리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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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초가는 아닌데 벽엔 두툼한 진흙이 발라져 있고 기와집은 아니지만 지붕엔 넓적한 나무기와가 촘촘히 이어져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창문은 한군데도 없다.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방문에는 문틀이나 창호지 대신 대나무로 살을 엮고 나뭇잎으로 빈틈을 메워 방안에 앉으면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동굴 같은 느낌이다.
육지에서는 산골짝 화전 마을에서나 한 두 채 찾아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진 너와집. 울릉도에서는「투막」이라고 부르는 이 통나무집이 1백년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마을을 이루고있다.
우리 나라 유일의 투막촌이 남아있는 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동-.
울릉도의 중심지 도동에서 해발 9백84m의 성인봉을 넘어 4∼5시간 산길을 걸어가거나 정 반대쪽 천부항 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 1시간쯤 올라가노라면 숨이 턱에 닿을 때 쫌 해서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면서 광활한 산 속의 대평원이 펼쳐진다.
1세 기전 전라도에서 첫 정착 민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해서 나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뒤쪽은 가파른 산으로 막혀있고 드나드는 곳이 한 두 군데 밖에 없는 지형지세가 천혜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어 그 옛날 우산국의 본거지가 아니었겠느냐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나리동은 서울운동장이 여남은 개는 충분히 들어섬직한 45만평의 분지(분지).
나리동은 큰 나리, 작은 나리, 알봉 등 3지역으로 나눠지고 큰 나리에 있는 16가구 중 7채가 백년세월의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투막 이다.
『해방 전만 해도 이곳에는 투막이 많았심더. 나라에서 벌채를 못하게 하고 밭농사도 시원찮고 해서 한 두 집씩 떠나 버리고 나무지 집도 함석하고 스레트로 지붕을 고치지만 그 안은 투막 한가진기라.』나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김삼룡씨(53)는 남아있는 집들이 겉모양을 바꾸기는 했지만 원래는 모두 투막이었다고 설명해준다.
나리동의 투막은 육지의 너와집·귀틀집과 마찬가지로 못을 전혀 쓰지 않고 통나무와 나무 껍질만으로 지었다.
형태와 크기가 독특하고 바람과 눈이 많은 섬 지방의 기후에 잘 견딜 수 있도록 매우 견고하게 지어져 너와집이나 귀틀집에 비해 원형이 비교적 잘살아 있다.
울릉도 투막은 대개 방이·3개씩이고 부엌이 허간과 장독을 겸해 너와집이나 귀틀집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큰 편 방은 지름 20∼30식, 길이 3m쯤의 통나무를 정방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2개를 먼저 만든 뒤 한가운데 생긴 공간은 양쪽에만 통나무로 막아 3간을 완성한다.
통나무 사이로 벌어진 틈은 진흙에 억새풀을 섞어 물에 반죽한 것으로 메워 평평한 벽으로 만들고 방이 완성되면 한쪽으로 5∼6평쯤 되는 커다란 부엌을 달아낸다. 마루가 없는 대신 방과 부엌 주위에는 1∼l·5m쯤의 간격을 두고 억새풀이나 옥수수 대로 촘촘히 엮은 울타리를 처마 높이만큼 올려 두른다.
농촌의 초가와 달리 울타리를 집에 바짝 붙여 놓은 것은 바람이 방벽에 직접 와 닿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울릉도는 제주도만큼이나 바닷바람·산바람이 드센 곳이어서 투막 지붕의 고래쇠 나무로 만든 기왓장 마다에는 어린아이 머리 만한 돌들이 하나씩 놓여있다.
80여 년 전에 투막 짓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김양남 할머니(95·도동 3동)는『네살 때 경주에서 부모를 따라 울릉도로 건너와 살았는데 천부에서 멀지 않은 대만 고하에서 어부들이 울창한 산림을 베어내 집을 지었는데 도구라고는 도끼와 보례(쐐기의 일종)뿐이고 통나무를 멀리 가지고 갈 수 없어 베어낸 자리에다 짓곤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벽을 쌓는데는 횡경피나무·단풍나무·너도밤나무를 주로 썼고 굴뚝은 나무가 단단한 주목둥치를 잘라 그 안을 파낸 뒤 세웠으며 지붕에는 고래쇠나무 외에 굴피나무·참나무를 기와모양으로 잘라 얹었는데 비가 새거나 눈 무게로 내려앉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나리분지의 투막에서 20여 년 동안 살다가 지난봄 집을 비워둔 채 천부로 이사했다는 박일권씨(48)도『얼마나 오래 전에 지었는지 잘 모르고 살았지만 한번도 손본 일이 없었을 만큼 짐이 단단했다』면서『울릉도에는 대체로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고 특히 나리에는 처마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이 쌓여 11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는 온통 눈 속에 파묻혀 살고 바람이 그칠 날이 없어도 집안에서는 추운 줄 모르고 지내 선조 들의 덕을 많이 본 셈』이라고 말했다.
투막촌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리를 떠나는 것은 이곳이 해발 6백m의 고지대여서 심한 냉해 때문에 농작물이 잘 되지 않고 수입의 큰 몫이던 약초도 줄어든 데다 땔 감 조차 옛날처럼 흔하게 베어 쓸 수 없기 때문이다.『7채의 투막 가운데 4채에만 사람이 살고 3채는 비어있는 채 아무도 들보는 사람이 없지요. 군에서도 정착초기의 생활상을 간직한 투막 보전에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대책이나 보전을 위한 지원 없이는 관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년도에는 울릉도 개척 1백 주년을 맞아 나리분지의 투막을 도동으로 옮겨 민속박물관으로 꾸며보고 싶다는 것이 울릉군수 김호동씨(52)의 의욕이다. <울릉도=홍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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