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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장애를 이긴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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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장애인에게 행복을 물어보면 실례일까? 그러나 이들 세 사람에게 그런 우려는 씻어도 좋다. 행복해 보이고, 실제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저절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용로(39).정진완(37)씨와 가수 강원래(34)씨.

모두 성공이라는 열매를 거머쥐는 순간 인생에서 가장 깊은 수렁으로 떨어졌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때 장애인이 됐다는 의사의 '선고'에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웃고 있다.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했다. 지난 20일 '장애인의 날'에 이들이 들려준 완전한 사회복귀와 재활의 의미는 무엇일까.

◇방황기간은 짧을수록 좋다=미스터 코리아 첫 출전을 앞둔 1990년 여름. 보디 빌더 이용로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시합에 제출할 기본 포즈 사진을 찍고 '총알 택시'를 탔다.

인생의 다른 배를 탔다고 느낀 것은 9일 뒤 병상에서 의식이 돌아온 때였다. 그로부터 2년여 그는 유서를 써놓고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유희'를 계속했다. 그를 삶으로 '초대'한 것은 한 조각의 햇빛이었다.

"아침 병상에서 우연히 창 밖을 보았습니다.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에 햇빛이 반사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벅찬 느낌도 받는구나 생각했지요."

그는 다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보조기에 의지해 오로지 팔의 힘만으로 걷고 또 걸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 재활병원(원장 박창일)에서 밑창이 닳아 신발을 바꾼 장애인은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25㎏이나 빠졌던 체중이 회복되고, 1백30㎝의 가슴둘레와 46㎝나 되는 팔둘레의 근육도 돌아왔다.

정진완씨는 87년 친구의 입대 환송회를 치르고 돌아오다 변을 당했다. 승합차를 함께 탔던 친구 몇몇은 사망했고, 그는 척추 아래 모두를 잃었다. 재활병원에서 그는 골치 아픈 '악동'이었다. "유리창을 깨고 시비를 걸고 병실에서 담배를 피웠지요."

보다 못한 박창일 원장이 그를 불렀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고 단호하게 꾸짖었다. 방황은 이렇게 3년을 끌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에 비해 강원래씨의 방황은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짧았다. 댄스 그룹 '클론'의 멤버로서 화려한 춤과 노래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전력으로 보면 공백은 더 길었어야 했다.

"눈물도 남들이 없는 곳에서 흘렸지요. 모두가 저를 보고 있는데 강해져야죠." 그는 요즘 아내와 인공 수정을 통해 2세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장애 후의 심리는 누구나 부정→분노→좌절→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들 또한 같은 과정을 겪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방황하는 기간과 이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재활에 시간이 걸린 만큼 인생도 줄어듭니다. 사회에 짐이 되느냐, 기여하는 사람으로 남느냐는 빨리 결정할수록 좋습니다."

◇스승은 먼저 장애를 극복한 '선배'=이용로씨와 정진완씨를 일으켜세운 것은 운동이었다. 그들을 이끌어준 사람은 먼저 장애를 당했던 이성근(97년 암으로 작고)씨.

장애인 극복 대통령상까지 받았던 그는 거리 외출에 함께 동행하고, 수영과 농구를 가르쳐주며 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세계를 제패(시드니 장애인 올림픽 사격 금메달)한 정진완씨의 사격 솜씨도 이성근씨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용로씨와 정진완씨는 '그는 우리 인생의 스승'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당신들 뒤에도 장애인은 계속 생길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하듯 가르치세요"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는 것.

◇진정한 재활은 사회복귀=이용로씨는 99년 자신의 전공을 살려 헬스 센터를 열었다. 집 전세금 6천5백만원에 빌린 돈 1억원을 보태 사생결단으로 시작한 첫 사업이었다.

남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사업 전망은 흐렸지만 그 와중에도 용인대 특수체육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내친 김에 용인대 체육과학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재 논문 통과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동안 노숙자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살길은 본래의 나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진완씨도 올해 용인대 특수체육학과에 입학했다. 경력을 살리고 장애인의 스포츠 재활을 돕기 위해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

강원래씨는 휠체어를 탄 장애 어린이를 TV 어린이 프로에 출연시키려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한 뒤 당황했다. 아직 사회가 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

하지만 그는 사회의 편견에 개의치 않는다.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장애인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서고,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정도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장애인의 완전한 재활.그것은 자신이 좋아하고, 목표한 것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정의했다.

고종관 의학전문기자
사진=임현동 기자<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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