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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유부녀 8명 등친 사기꾼 구속기소

중앙일보

입력

“부인, 수락산 마당바위에 가려고 하는데…”

‘그 남자’는 수락산의 봄 끝자락에 다가왔다. 지난 2012년 5월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유모(49·여)씨는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서 우연히 한모(60)씨를 만났다. 고급 승용차를 탄 한씨는 유씨에게 길을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한씨의 세련된 외모와 능숙한 유머가 유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씨는 “40여개 하청업체와 직원 4000명을 거느린 중견기업을 운영한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의 차 트렁크에 실린 고급 등산용품을 보여주며 “원하는 것은 가져가라”며 유씨의 호감을 샀다. 두 사람의 밀회는 1년 넘게 지속됐다. 관계가 깊어지자 한씨는 본색을 드러냈다.

“급하게 3억 원만 빌려줄 수 있을까”

회사가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요구였다. 고민끝에 유씨는 대출까지 받아 한씨에게 돈을 건넸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유씨에게 한씨는 “매달 수백만원의 용돈을 주겠다” “나중에 노래방이나 커피전문점을 차려주겠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돈을 받은 한씨는 곧 유씨와 연락을 끊었다.

서울북부지검 형사5부(조호경 부장검사)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무고 혐의로 한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1일 밝혔다. 한씨는 지난 2005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유씨 등 부녀자 8명으로부터 적게는 3000만원에서 많게는 5억원까지 총 18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한씨는 지난 1998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서울 북부 도봉산과 수락산 및 근처 댄스카페에서 유부녀들에게 접근해 자신을 중견 기업 사업가로 속여 유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유부녀의 경우 외간남자와 어울린 약점이 있으면 쉽사리 고소를 못한다는 점을 한씨가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씨는 돈을 받은 뒤 “사업자금을 세탁해야한다”며 피해자들의 계좌로 재입금한 후 현금으로 받아 챙겼다. 이를 근거로 “빌린 돈을 갚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고소한 피해자를 도리어 고소까지 했다. 일부 피해자로부터는 “투자 목적에 맞게 사용했다”는 가짜 사실확인서를 받아 지난 5월 검찰로부터 한 차례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씨가 가진 10여개 계좌에 대한 정밀 분석과 가짜 사실확인서 작성자 조사를 통해 그의 범죄 행각은 들통났다. 한씨는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돈을 자신이 운영하는 노래방의 직원 임금이나 건물 임대료로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대출을 받아 한씨에게 빌려준 피해자들은 임시직으로 일하며 이자를 갚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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