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스러우나 요사하지 않은 기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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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카시아>
아카시아 꽃길을 혼자 걸어본다. 5월이 되면서 한껏 물 오른 가지에는 푸른 잎이 무성하고 그 잎새사이 사이로 하얀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부드러운 바람결에 꽃가루처럼 퍼지는 아카시아 꽃향기는 머얼리서 방황하던 꿀벌들과 나비들까지 불러들인다.
훤칠한 키에 풍성한 가지와 잎새, 그리고 탐스러우나 요사하지 않고, 고귀하나 교만하지 않은 아카시아의 하얀 꽃송이들을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
너무나 평범해 오히려 마음 푸근한 아카시아 꽃길을 둘이서 손잡고, 때로는 여럿이 훈훈한 마음으로 걷곤 했었다 - 아카시아 그늘은 우리들의 안식처였고 그 달콤한 꽃향기는 우리들 젊은 날의 기쁨이었지 - 나비처럼, 벌처럼 환상의 무드 속에 취해 있었지-.
세월은 가고, 그때 그 사람들, 그 다정했던 친구들도 세월 속에 하나 둘 모두다 제각기의 인생의 항로 따라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사람은 가고 소식 없어도 5월이면 어김없이 거기, 그 선 자리에서 굳은 언약처럼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주는 아카시아의 변함없는 마음이여-.
나는 언젠가 뒷동산의 아카시아 꽃을 꺾어 유리항아리에 담뿍 담아, 향기로운 꽃술을 담아 놓고 하루의 피로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가난한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슴 아릿한 감격용 느꼈던 일도 있었다.
아카시아, 그는 제 몸을 주어 술을 빚게 하고 제 몸을 불살라 추운 이들의 방을 데워주고, 집 없는 이들의 기둥과 지붕이 되어 주기도 하느니 - 그 사랑, 그 헌신을 사람인들 어찌 따를 수 있으랴.
사랑하는 이가 보내준 타오르듯 붉은 장미다발, 축하연에 보내온 카네이션과 백합들, 항상 목을 길게 늘리고 기다림에 지쳐있는 노오란 달맞이꽃 등, 모두가 내 마음속에 사무친 추억이며 내 생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내가 유독 아카시아를 내 마음의 꽃이라 함은, 그 위풍당당한 거구는 혼자 서있어도 좋고 가로수로 줄지어 서있으면 더욱 마음 든든해, 마치 나의 생을 에스코트해주는 기사들이라 여겨지기도 함이다.
초야의 범부이듯, 소박하고 너그러운 아카시아꽃길 - 나는 아름다운 추억 안고 미소 지으며 나의 꽃길을 걸어간다.
전숙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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