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사랑도 대화도 없는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따르릉』 전화수화기를 들자마자 다급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며칠 외박하고 돌아와서 어머니와 또 싸우고 있어요.』 『전 집을 나갈래요. 여자가 저렇게 매만맞고 사는 거라면 전 살고싶지 않아요.』
「생명의 전화」 상담원 이모씨 (35·K고교사)와 전화의 여주인공사이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해 1시간 가까이 긴땀을 흘리고서야 전화주인공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끝났다. 18세에 고2생이라고만 밝힌 주인공은 전에도 두번 비슷한 문제로 전화를 걸어온 소녀였다.

<진땀흘리는 상담원>
지난 4월3일 서울종암경찰서는 덥수룩한 머리의 김모군(19)을 특수강도혐의로 붙잡았다. 김군은 전날저녁 동네약국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 『먹고 죽겠다』며 신경안정제 4백알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웅큼을 입에 넣은채 길거리에서 신음하는것을 행인이 발견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김군은 택시운전사 김모씨 (46·성북구 안암동)의 외아들, 3년전 중학교를 졸업한뒤 학업을 포기한채 짐에서 놀고 있으나 아들의 성격이 비뚤어질까봐 아버지는 큰소리 한번 제대로 치지 못하고 용돈까지 한달에 1만원씩 줬다. 『인생이 허무하고 싫습니다. 착한부모님께 죄만짓는것 같아요.』 김군은 경찰에서 울부짖듯이 고백했다.
가정의 불화는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며 그들의·인생을 일찍부터 단절시킨다.
「부모의 기대」역시 견딜수없는 부담으로 작용, 청소년들을 비행으로까지 이끄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고민속에서 청소년들은 『우리의 고민을 정확히 읽어주는 부모가 아쉽다』 또는 『자유롭게 내버려 둬달라』는등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최근 중앙대정신의학교실 민병근 교수팀이 남녀고교생들을 대상으로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정생활에 만족을 느끼는 학생은 17·3%에 불과하며 오히려 27·6%가 가정생활에 불만족하고 있으며 48·8%가 「가족의 과잉기대로 인해 괴롭다」고 밝히고 있다.
전자오락실에서 만난 T군은 강남에 있는 50평짜리 고급 아파트에 사는 중3생. 아버지는 사업을 하느라 거의 매일 통금시간이 가까와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고 어머니는 여성단체일이다, 교양강좌다, 계모임이다 해서 낮에는 짐을 비우기 때문에 현관문 열쇠는 갖고있으나 「쓸쓸한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안나」 저녁식사때까지는 친구네 집에도 가고 오락실에서도 시간을 보낸다는 얘기였다.
현대에 와서 가정의 기능이 약화되는 대신 학교와 교우집단 매스미디어등 사회적 환경이 미치는 영향의 확대로 가정이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 가족제도의 핵가족화와 자녀중심에서 부부중심, 부·부 각개중심으로까지 발전하는 마당에 10대들은 가정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더욱 멀어질수밖에 없다고 사회학자들은 지적한다.
청소년문제전문가 황석근씨가 자신이 재직하던 장훈고교전교생을 대상으로한 최근 조사를 보면 학생들이 하루에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30분이내가 54%, 대화시간이 전혀 없다는 대답도 10%를 차지해 부모와 자녀간의 심리적 단절의 폭이 넓음을 나타냈다.
또 대화의 내용은 아버지의 경우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라」는 것이 56%, 어머니와의 대화내용은 용돈에 관한 내용이 58%.

<어른잘못도 인정을>
행동과학연구소 상담실 김계현상담원은 『대화의 양이 적기도 하지만 부모·자녀사이에서 너무 교훈적인 말, 있으나 마나한 의례적인 말만 오가는것 같다』고 결론.
김씨는 또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부모들을 보면 자녀의 잘못과 비행만 걱정했지 놀랍게도 자기 방어의 벽이 두텁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문제청소년의 상담보다 부모의 잘못도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는것이 더욱 어려울 때가 많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 고영복교수 (사회학)는 『청소년에게 가장 바람직한 가정환경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가정은 물질적 환경보다도 심리적환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가정의 협동과 사람이 중요하고 청소년문제는 『부모가 자녀들이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지않는 입장에서 포용력과 설득력을 갖추면 어느정도의 해결의 길은 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