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최고야…"|지체 높던 세도가들의 애용품「연죽」을 만든다|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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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생의 숱한 애환을 열손가락 굳은살에 파묻은 채 타고난 운명일랑 구성진 노래 가락에 흘려보내던 우리네 장인(장인)계급.
전통문화의 응달 속에 엄연히 한획을 그었던 사회계층도 세월의 흐름 따라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고집스런 몇몇만이 서녘하늘의 햇살처럼 옛 정신을 재현하고있다.
전북 임실의 한마을에 40여년을 하루같이 두어칸 남짓한 공방(공방)에서 손때묻은 공구(공구)를 벗삼아 담뱃대 하나만을 만들어온 꼽추장인이 살고있다.
마을 남쪽을 끼고 도는 냇가에 아낙들의 빨래방망이 소리가 평화로운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우리 나라에서 단 한명 생존해 있는 오동상감연죽장(오동상감오죽장) 추정렬씨(55·중요무형문화재 65호)의 고향이자 그가 평생을 두고 연죽(연죽)을 만들어 낸「담뱃대 마을」이다.
『제 스승께서 만드신 담뱃대는 아무리 놋쇠재떨이를 두드리며 호령호령해도 10년을 넘어간다고 했지요.』
담뱃대는 멋도 있어야 하지만 오래 쓸 수 있도록 견고해야 한다고 추씨는 말한다.
요즘도 장날이면 추씨는 어김없이 오수장터에 좌판을 벌인다.
앙증맞고 오묘한 추씨의 담뱃대솜씨를 온 마을 주민들이 경이의 눈으로 감상하는 것도 이날이다.
추씨가 내놓는 오동상감연죽은「태극죽」「은삼동구리」「민죽」「미꾸리죽」등 예부터 지체 높고 돈 많던 세도가들 손에서 놀던 최고급품들이다.
삼강오륜(삼강오륜)을 뜻한다는 세마디 혹은 다섯마디짜리 검고 가는 오죽(오죽)대도 멋지지만 백동(백동)위에 은과 오동(오동·구리와 금의 합금)으로 태극·학·매화 등 갖가지 무늬의 상감(상감)을 입힌 「통백이」와「무추리」는 그대로 추씨의 영혼이 숨쉬는 금속세공의 극치다.
『남원에서 소학교만 마치고 15세 때 이웃마을의 박상근선생님댁 공방에 들어갔읍니다. 거기서 3년 동안 선생님 일을 거들며 장인의 몸가짐과 제작비법을 배웠읍니다.』
추씨가 18세 되던 해 일경(일경)에 강제로 끌려「가미까제」특공대원 선발장으로 갔다. 추소년은 필답고사 때 일부러 틀린 답안지를 작성했다.
경찰은 그에게 스파이누명을 씌운 뒤 경찰서 유치장에서 집단으로 폭행, 그때 구둣발에 등뼈를 다쳐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된 채 고달픈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사나흘 꼬박 일해야 하나를 만들까 말까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갑니다.』
추씨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수천개의 통백이 무추리 하나하나가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한 자신의 분신(분신)들이라고 한다.
은판과 오동판을 손톱만큼한 크기로 네모나게 잘라 서로 어긋나게 붙이는 밑판만들기에서 제작은 시작된다.
이 위에 오동판을 갖가지 문양(문양)으로 오려 붙여 땜쇠로 때우고 자근자근 두들겨 편 뒤 동그랗게 말아 통백이나 무추리의 목줄기 부분에 끼운다. 이때는 색깔이 안나지만 한지에 오줌을 적셔 감아놓았다가 1시간쯤 후에 풀어보면 은은하면서도 선명한 검은색이 떠오른다.
『지금도 감았던 종이를 풀 때마다 손끝이 떨리는 게 스승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첫 작품을 풀어볼 때의 그 기분 그대롭니다.』
추씨가 쓰고있는「다듬목」도 4대째의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물려져 2백여년이나 묵은 파이고 얽은 바로 웃대스승 박씨의 유물이다.
『너나없이 궐련을 피우면서 담뱃대가 팔리지 않아 한때는 풀무불을 끄고 장터에 나가 땜질을 했지요.』
그리나 마을어른들이 찾아와『우리마을의 자랑인 담뱃대는 어떻게든 만들어야한다』는 충고에 다시 풀무질을 했다는 것이다.
「궁상스럽고」「한심한 일」인줄 알면서도 다듬목을 두드린지 만35년만인 지난해 11월17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민속연구가 심우성씨에 의해 추씨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 뒤로 추씨는 통백이 부분에 자신의 이름석자를 도안한 무늬를 꼭 새겨 넣고 있다.
『추정렬석자가 품질표시지요. 그건 바로 오수마을 담뱃대니까요.』
요즘 실제로 담배를 피우려고 백동연죽을 사가는 사람은 없단다. 주로 주문에 의해 만들지만 골동품이나 서화와 같이 돈 있는 사람들의 가치보존수단이나 수집가들이 수장용(수장용)으로 사간다.
값은 한개에 10만∼15만원. 한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해 9∼10개를 만들면 순수입은 60여만원. 합금에 드는 금값이 자꾸 오르고 대(죽)재료인 오죽(오죽)을 구하기 힘들어 이윤이 점점 박해진다고 한다.
『아들놈이 오죽을 찾아 하동 문경 구례 등 전국을 헤매지만 여간 찾기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금년엔 아예 오죽뿌리를 구해 집주변에 심기로 했다는 추씨는 3남 용두군(19)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애비길을 택한 것 같다』며 별로 싫은 기색이 아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생계보조비 10만원이 매달 나오고 주택융자금 3백만원을 얻어 아담한 집도 새로 마련했다.
『후회 없이 걸어온 내 길, 나야 이대로 허허롭게 살다가면 그만이지만 아들놈 말고 우리마을에서 한사람만 더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나왔으면 좋을 텐데….』
오죽 찾아 먼길 떠나는 아들을 보낸 추씨는『젊은이의 변덕이란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 않느냐』며 이마에 주름을 잡는다.【임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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