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7)|<제73화>증권시장(15)|청산거래 기일 시비|이현상<제자=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대한증권거래소가 개설되기 앞서 난제중의 하나는 매매거래의 종류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실물거래야 거론할 필요도 없겠으나 문제는 언제나 말썽 많은 청산거래 기일을 얼마로 잡느냐가 쟁점이었다.
증권업계 쪽에서야 당연히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될수록 길게 잡겠다는 것이고 재무부 측은 투기의 우려 때문에 가급적 풀이도록 제동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인상 차관이 불렸다. 청산거래를 허용하진 해야겠는데 도대체 기일을 얼마로 잡아야겠느냐고 물어왔다.
처음 시각은 1개월로 하고 나서 차차 상황을 보아가면서 2개월로 늘려 가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고 충분한 보충설명을 했으나 그래도 결단을 못 내리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것만은 장관의 지시를 받아야겠다며 김현철 재무장관실로 들어간 길과 1개월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거래소의 개장당시 매매거래는 ▲실물1부 ▲실물2부 ▲청산거래 등 3가지로 구분했다.
실물1부에서는 당일 결제만을 취급케 하는 한편 2부에서 10일 이내 짜리를, 청산거래는 1개월 이내 짜리로 나누어서 실시했다.
그러나 재무부 고위층에서는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윤 차관에게 다시 불려가니 청산거래 기일을 15일로 줄이라는 지시였다.
실시한지 불과 닷새만에 청산거래기일을 절반으로 줄이자 증권계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결국 다시 보름만에 1개월로 환원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느 쪽도 나무랄 수 없는 웃지 못할 시행착오였다.
그후 증권업계에서는 청산거래기일이 그래도 짧다고 불만을 표시하면서 일제시대 때처럼 3개월로 연장해 줄 것을 끈덕지게 졸라댔다.
하는 수없이 재무부 측은 관계 인사들을 모아 토론회를 여는 한편 금융통화위원회의 자문을 얻기로 했다.
토론회에는 윤 차관과 송대순·설경동·이건혁·최도용·서극형씨 등이 참석했는데 대체적인 의견은 청산 기일을 연장해주면 다소 부작용은 있을 것이나 우려할 바는 못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금통위 족의 의견은 그 반대였다. 틀림없이 투기가 조장될 터이므로 초창기의 증시로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었다.
이같이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는 가운데 증권업계의 꾸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결국은 최장 2개월까지 연장되었다.
재무부의 판단으로는 상장종목이 워낙 적은데다 주식분산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오히려 주가의 기복이 인위적으로 조작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투기만 문제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청산거래의 장려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매 이같은 조치는 결국 과당투기의 소지를 남겨 후일 국채파동·대증파동·5월 증권파동 등 달갑지 않은 우리나라 증시의 오점을 파생시켰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조직면을 살펴볼 때 증권거래소는 반관반민의 준공영제의 성격을 띠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던 회원제도 아니요, 그렇다고 일본처럼 주식회사의 형태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하의 전비조달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취인 소령에 의거해서 증권거래소 설립을 인가했던 까닭에 이 영이 규정한대로 준공영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출자자들에 대해 정부가 연6%의 배당을 보장해주는 한편 경영진의 임명권을 정부가 차지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금은 모두민간이 냈으면서도 주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총회 같은 기회는 일체 봉쇄되어 있는 모순을 잉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부가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거래소 이사회는 정관의 임의 변경을 비롯해 예산·결산의 승인, 상장증권의 승인과 폐지 등 모든 권한을 쥔 거래소의 최고의결기관으로 군림했다.
거래소 설립 당시의 자본금은 3천만원으로 정했으나 이같은 상황에서 누가 봐도 자발적인 출자를 기대하긴 힘든 노릇이었다.
재무부로서도 딱한 입장이었으므로 산하단체인 금융단과 보험단으로 하여금 출자에 참여토록 한 것이다.
어쨌든 증권거래소의 설립이 있기까지는 증권업계의 눈물나는 노력과 재무부 측의 이해가 학께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윤인상씨나 송대순씨 같은 분들은 지금의 증권계가 동상을 세워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증권협회가 생기고 2년만에 중권거래소가 설립되기까지 재무장관만 해도 박희지·이중재·김현철씨 등 3명이 자리를 바꿔 앉았으나 모두가 증권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증시로서는 또 하나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계속> 【이현상】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