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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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느 노시인은 그를 두고 「삼절」의 하나라고 했다. 변옹 3형제―. 한학자인 변영만,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 시인이며 영문학자인 수주 변영노. 이중에서도 수주는 「최절」이라는 것이다.
일석(이희승)은 그를 「삼소」에 비유하기도 했다. 「삼소」라면 중국송대의 문장가인 소순·소식·소철을 말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수주의 명구다.「논개」의 일절.
수주는 시인이나 학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언론계에 몸담은 일도 있으며, 세간에선 명정가(명정가)이자, 해학가로도 유명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서울 장안에 아직 전차가 다닐 무렵의 얘기다. 전차의 중간문은 승객이 내릴 때만 이용되었다. 하루는 주기가 거나한 수주가 바로 그 문으로 타려고 했다. 차장은 당연히 가로막았다. 수주의 일갈.
『나는 이 문으로 탈수있는 사람이야!』
『누구신데요?』
『대한민구 제일가는 사람도 몰라?』
그는 한 세상을 이처럼 호방하게 살았다. 아마 우리시대의 마지막 「멋쟁이」가운데 한사람이었을 것같다.
수주자신은 말하기를 『나는「돈·키호테」를 배우고 싶다』고 했었다. 『명정천년기』 에 남긴 말이다. 『작은 지혜를 믿어 무엇하며, 작은 역량을 헤아려 무엇하며, 결과와 여하를 따져 무엇하랴.』해탈의 경지다.
바로 그의 멋은 조화나 긴장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는 일탈에 있었다. 필경 그가 평생을 두고 술의 맛이랄까. 멋을 즐긴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돈·키호테」의 그것만도 아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약관의 나이에 그 절절한 명문의「독립선언서」를 영역해 만방에 보냈으며 25세때엔 『조선의 마음』 이란 시집으로 망국의 한을 풀었다.
한때는 일제치하에서 YMCA의 비밀조직에 가입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해학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공·맹에까지 이르러 잠시 필화를 입은 일도 있었다. 무슨글에서 수주는 공자를 『위대한위선자』로, 맹자를 『절세의선전가』로 풍자했었다. 그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유림들이 아니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래있어/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보니/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같은 봄비만이….
마침 시절도 봄비 내릴 이 무렵, 수주가 세상을 떠난지도 20주기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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