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의 「반혁명」을 말하는 원충연씨|「민주」지키려다 고행…후회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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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당시 나의 행동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15년이 지난 현재도 떳떳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85년 5월7일. 이른바 박정희대통령정권 전복을 노렸다는 5·16반혁명사권과 관련, 구속돼 복역하다 오는 7월5일인 만기일을 석달 앞두고 3일 특사로 풀려난 원충연씨(60·전육군대령·전국가재건최고회의공보실장)는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영어의 몸 15년-. 안양교도소를 나온 그는 패기 찬 장년의 모습에서 이젠 환갑노인이 됐다. 철부지 아들은 자신의 특사를 탄원할 만큼 컸고 곱던 부인 최정옥씨(55)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가 됐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원씨는 막상 「반혁명」사건으로 화제가 미치자 거침없이 당시를 털어놓았다.
『5·16혁명은 내가 주서독대사관의 초대무관을 지내고 귀국해 얼마 안있을 때 일어났어요.』
16일 아침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날 하오 혁명군측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협력해달라』는 첫마디와 함께 혁명공약을 제시했다는 것.
이 때 원씨는 혁명공약6항 『모든 부정부패를 몰아내면 민정이양하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국민에 대한 약속을 믿고 협조를 수락했다고 했다.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공보실장을 맡았고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박대통령을 보좌했다.
『그러나 측근자의 자리에서 자세히 관찰해본즉 날이 갈수록 정권의 민정이양은 커녕 권력에만 집착하는 것을 깨닫게됐고 이를 안타깝게 느꼈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지만 무력으로 현정권을 쓰러뜨리는 방법밖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됐지요.』 원씨는 1년 만에 공보실장 자리에서 군부대로 복귀, 제2사단부사단장·정훈학교 부교장으로 있으면서 뜻맞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원씨 등은 혁명예비단계에서 한 밀고자에 의해 발각돼 보안사에 구속됐고 그 해 7월5일 군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사건과 관련돼 구속된 사람은 2군단 포병사령관 박인도대령, 육군관리부과장 안중광대령, 정보참모부과장 우덕주대령, 인사참모부과장 이인수대령, 육군본부작전상황실장 김문한중령 등.
해방되던 해 일본중앙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대학원 1회졸업생인 원씨는 서울대정치학과에서 전임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여순반란사건이 터져 군의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 당시 서울대강사2명. 졸업생10명과 함께 정훈1기로 군에 투신했다고 말했다.
『대학강단에 서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씨는 혁명에 성공한다면 현역육군소장이상의구국위원회를 구성, 3개월 이내에 민정이양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했다.
원씨는 혁명정권이 지키지 않은 민정이양 공약을 군인들이 지켜줘야 한다고 역설해 동료들의 동조를 얻었었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는 주로 종교서적을 비롯, 역사·철학·정치학·경제학·법률학 등 각종 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이 기간 하나님과는 더욱 가까운 위치에서 접할 수 있었다며 그런 면에선 오히려 『은혜로운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엔 10·26사건과 관련된 전청와대비서질장 김계원씨가 같은 교도소에 수감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는것. 김씨는 건강이 나쁜 것 같았고 얼마 전엔 고혈압으로 쓰러져 외부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는 『수감생활 중 흉악범으로 교도관들까지도 대하기를 꺼렸던 「쌍무기수」란 별명의 죄수에게 접근, 3개월만에 독실한 신자로 교화시킨 일은 정말로 뿌듯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고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원씨는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고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며 『앞으로의 행동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허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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