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진도 「홍주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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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흰 잔에 찰랑이는 새빨간 액체는 마치 홍옥. 은은한 향기가 방안을 채우고 코를 간질인다.
한 모금을 입안에 굴려본다. 순곡주정의 향취가 목젖을 타고 내리면 뱃속은 벌써 「찌르르」하게 취기가 오른다.
『진도에 오셨으믄 홍주맛을 보고 가셔야지라우. 진도라믄 진도개는 알아도 이 홍주가 더 진귀한 진도특산인지는 잘 몰랐지라우….』
전남 진도군 진도읍. 반도남단의 전통명주 홍주는 그 선연한 빛깔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고래주 가운데 홍주만큼 맛과 향, 빛깔 등 술의 3요소를 다 갖춘 미주도 없다.
『얼른 취하고 빨리 깨고 뒤가 깨끗하지라우. 몸을 덥혀 주고 위를 상하지 않으면서 빛깔마저 고우니 술이면서 약이라 그야말로 명주제….』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주 가운데 빛깔이 이처럼 유혹적인 게 있는가싶다. 티없이 맑은 빨간 방울은 바로 「루비」빛이다.
성냥불을 그어대면 확 불이 붙는 독주. 주정도가 높기로 이름난 「배갈」이나 「보트카」처럼 단순히 독한 것만 아니다. 술을 내릴 때 선홍색을 우려내는 한약재인 지초의 작용으로 역겹지 않은 쌉싸름한 뒷맛이 있다. 진도사투리로 『훈감한 맛』이다. 지초의 약효로 소화·건위·강장의 작용까지 하니 금상첨화다.
술의 내력이나 제조역사는 정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주민들은 1백여년 전부터 이 술맛을 즐겼다고 한다. 노인네들의 전설 같은 술내력이 오히려 가슴에 찡하다.
진도는 고려조 이래의 귀양지였다. 모반에 실패했거나 상감께 직언으로 미움을 샀거나 일대의 권문세가가 반대파의 득세로 밀려났거나 그 어느 경우든 유배자들의 가슴엔 한과 울분이 응어리졌을 밖에.
귀양살이의 서글픔을 술을 마셔 잊으려던 선비는 진도에 무진장한 약초인 지초를 보고 약주를 빚어보았다.
영영세세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니 한잔에 취하는 독주가 되었고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이 술 빛에 담겨 피 빛이 되었단다. 비파학적이지만 그럴듯한 설명이다.
『홍주는 정성 없이는 못 내리는 술이여라우. 한번 내릴라믄 한밤을 꼬박 새워요.』 이 마을에서도 단 세명뿐인 제조기술보유자 중 한사람인 김씨아주머니(57)는 빚는 기술이 여자 손으로만 전해왔다고 한다.
일제가 개인 집의 술 담그기를 금하면서 가양주로 내려오던 홍주도 맥이 끊기게되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그 기술을 아는 사람은 진도읍에선 「매미할머니」(20년 전 별세)한 분뿐이었다. 「강강수월래」의 선도창을 그렇게도 잘 불러 「매미」별명이 붙었던 그 할머니는 욕심도 많아 비법을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 주었단다.
김씨는 「매미할머니」의 건넌방에 세를 들었다. 1년이 넘도록 물을 길어주고 군불을 때주고 허드렛일을 거들어주며 어깨너머로 술 빚는 법을 익혔다. 김씨는 3년 전부터 다른 2명에게 기술을 가르쳐 줘 진도의 홍주제조기술자는 3명이 되었다.
홍주제조법은 우리의 전통소주제조법을 토대로 약간 변형한 것. 증류기는 흙으로 고리라는 것을 사용한다. 이 고리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위의 것은 반대로 밑이 좁고 위쪽이 넓게 벌려져있다.
쌀과 보리를 반반씩 섞어 술밥을 찐다. 밥과 누룩을 같은 양으로 섞어 역시 같은 양으로 물을 부어 술을 앉힌다. 뜨듯한 아랫목에 이불로 싸놓으면 10일이면 술이 익는대 이 술을 그대로 거르면 막걸리. 이 술을 끓여 소주를 내리는 것이다.
익은 술을 퍼서 술에 붓고 솥 위에 고리를 앉고 불을 땐다. 주정은 섭씨 78도에서 끓기 때문에 물보다 먼저 주정이 증류돼 떨어지는 것이다.
주정이 떨어져 내리는 고리꼭지 밑에 깨끗이 씻은 지초뿌리를 삼베에 담아 항아리에 얹어놓는다. 주정이 지초를 통과할 때 빨간빛과 독특한 맛을 얻게된다.
불때기가 가장 중요하다. 자칫 주정이 끓어올라 넘치게되면 기왕에 내린 술은 모두 버린다. 한 솥을 끓여 내리는데 꼬박 6시간. 꼼짝없이 쪼그리고 앉아 불을 살피고 고리 위의 물을 갈아내며 술을 내리는 작업은 도공의 불질만큼이나 정성스러워야한다. 주로 밤에 술을 내리는 것도 불을 잘 살피기 위한 것이 한 이유다.
김씨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홍주의 참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기술은 비전일밖에 없는 것이다.
원주 서말을 끓이면 보통 홍주 세 병(2ℓ들이)을 얻는다. 적게 내릴수록 독해진다. 2ℓ들이 한 병에 재료값만 3천원.
서울·부산·광주의 맛을 아는 고객들이 주문을 해가곤 정성비를 덧붙여 보내준단다. 홍주를 빚어 팔아 김씨는 아들·딸 남매를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했다. 30에 남편을 여의고 술빚기와 품앗이 일로 남매를 길러낸 김씨는 요즘 한 달이면 홍주를 20병정도 걸러낸다고 했다. 주문에 못 이겨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 술 담그기를 계속하고 있다. 20병을 팔면 돈으로 10만원 남짓. 진도전체에서는 월50병 이상이 생산될 것으로 보고있으나 워낙 공급이 달려 빛깔만 비슷한 가짜까지 나돌 정도다. 김씨는 근래 재배한 지초도 나돌고 있지만 지금도 꼭 산에서 채취한 야생만 쓴다. 그래야 제 맛과 약효가 나기 때문이다.
『올해로 홍주를 만들기 시각한지가 30년인데 그동안 밀주라고 세무서에 들켜 벌금 문 일이 수도 없소. 인자는 그만 담그고 싶어도 아는 양반들이 하도 찾아싸니….』
자신은 물론 전수자의 이름석자를 숨기는 김씨는 경주 법주나 산성 막걸리처럼 진도 홍주는 왜 정식으로 못 만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한다. 【진도=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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