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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046>|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제자=필자>(44)김계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동경탈출>
『조선의 지식인을 탓하고 나무라기 전에 정치 그 자체가 반성할 여지는 없을는지요? 군용열거에 절하는 농민들이 과연 순박한 농민인지, 그런 농민들의 배후에 면장이나 군수의 감시의 눈이 없었는지…, 이런 말이 여러분의 구미에는 못마땅할 줄 압니다만 이 사람은 거기 대해서도 약간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탈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면서도 기호지세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 버렸다.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으나 이번에는 박수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얼굴이 네모진 웬 낮선 인물 하나가 내 옆에 가까이 오더니 아주 정중하게 절을 하면서,
『김선생, 죄송합니다만 잠깐만 이리로…』 한다. (올 것이 왔구나!)
『잠깐만-』하고 경친청 자동차가 실어가서는 석 달, 혹은 반년씩 본의 아닌 삼선을 한 경험은 한두번이 아니다. 이『잠깐만-』은 또 몇달이나 걸릴 것인가?
겸창의 이웃동네에 사는 일본인 문우 하나는 말끝마다『전국이 재미없어지면 붙들려가요. 붙들려 들어가면 이번엔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못나와요…』하고 언외에 몸을 감추라는 뭇을 풍겼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무슨 대단한 사상가라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약간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되도록 귀 밖으로 흘려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가나가와」(신나천)현 관내에는「대단한 인물」이 없었던지, 대소정간에 무슨 일만 생기면제일 먼저「독꼬오」(특고)씨가 내게로 뛰어왔다.
그「재미없는」사태가 마침내 내게로 돌아 왔구나! 나는 순간만 자리에 앉혀둔 천년 생각이 났다. 내가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그 청년에게만은 알려야 하겠는데-. 그러나 나와 동행이란 것을 알면 이 친구들은 그 청년마저 연행해다가 골탕을 먹일지도 모른다.
나는 청년과의 연락을 단념하고 그 어깨가 막 벌어진 사내 뒤를 따라 연회장을 나왔다.
그러나「잠깐만-」을 경친청의 초대로 안 것은 곤경과민의 지레짐작이었다.
그 인물이 나를 인도한 곳은 제국「호텔」1호실, 거기가 이「융화」선수들이 반년 동안 「대절」했다는 삼모본부였다.
담배 연기가 자옥한 널따란 방에 20명 가까운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장혁주선생과 김선생님을 감사대회의 기초위원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수고스러워도 잘 좀 부탁합니다』
못한다면 그들과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일본관료들에게 비 국민의 낙인이 찍힐 것은 부문가지다. 우선은 경친청의 자동차를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터라 나는 분명한 의사표시 없이 우물쭈물 그 자리를 때워 넘겼다. (그 1호실에 나를 인도한「네모난 얼굴」의 친구가 얼마 전까지 교포국회의원으로 이름을 날리던 K씨 바로 그 어른이시다)
이튿날부터 서둘러서 며칠 후에 나는 동경을 탈출할 구실을 하나 장만했다.「전시생활상담소외지위원」-, 만주·조선의 전시생활의 실정을 직접으로 보고 듣는다는 것이 이 외지위원의 소임이다.
독직사건으로 유명했던 전철도대신「오가와 헤이끼찌」(소천꾸길)의 아들「오가와 잇빼이」(소천일평)가 거기 소장이었다. 그 전시생활상담소에 김을한씨가 나를 소개해 주었다. 이만한 명목이면 기거 표를 살수 있다.
해방을 7개월 앞둔 1945년 1월27일, B-29의 백서 동경폭격은「유라꾸쪼오」(유악정)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역 부근에서 포풍으로 한순간에 2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체 60구가 가까운 곤욕공원에 5, 6일이나 놓여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다.
역과 맞붙은 교통공사에는 직격탄 6발이 떨어져 지하 방공호에 묻힌 사체를 파내는데 l주일이 걸렸다.
그 날 하오 2시가 교통공사에서 내게 지정한 시간이다. 미리 신청한 북만여행의 차표를 받는 날-, 숙소인「지지료」를 나오면서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쯤은 여유가 있었다.
「누마부꾸로」(소대)의「학간놈」(백관음)은 거기서 15, 16분 거리-, 내게「이취경」을 가르쳐 주던「마쓰다」(송전) 노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가리라는 생각으로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2천평이 넘는 경내에는 전쟁냄새도 없이 조용하다. 비를 들고 뜰을 쓸고 있던 일꾼 사내가내 얼굴을 보더니『스님께서 몹시 기다리시던데요. 잠시 외출하셨지만 곧 돌아오실 겁니다』한다. 나를 기다렸단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뭘 잘못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30분도 더 지나 스님이 돌아왔다고「고오야잔」(고야산)대학의 학장을 지낸 이 70넘은 노학해은 손수 육필로「십방제국토무찰부현신」이라고 관음경의 한귀절을 쓴 내 호신부를 불전에 올려두고 여러 날을 기다렸다면서 그 호신부와 같이 자기가 입었던 모피조끼를 벗어서 내게 주었다.
어쩌면 북만으로 여행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먼저 왔을 때 한 것 같지만, 그렇게까지는 노스님이 유념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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