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쿠데타」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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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의사당을 점거하고 우익 군사정부수립을 요구했던 「스페인」민병대의「쿠데타」기도는 불과 17시간만의 단막극으로 끝났다.
「프랑코」총통사후 착실하게 민주화의 길을 걸었던「스페인」으로는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문제의 일부 우당 민병대는 군부의 호응과 지지를 호소했으나 군부는 끝내「카를로스」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출동하려던 일부 군부병력도 민주화 수호결의를 표명한「카를로스」국왕의 성명이 발표되자 군대를 철수시켜버렸다. 「쿠데타」가능성은 이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난 한나라가 『비틀거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민주화를 향해 가다가 비 민주화로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동안 이 나라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던 세계인들에게 안도감마저 준다.
왜 「스페인」의 「쿠데타」는 실패했으며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이 점은 세계가 주목할만한 관심사일 것도 같다.
우선「카를로스」국왕의 의연한 민주화 신념이 그동안「스페인」국민들 사이에도 깊은 신념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랑코」 총통의 후광을 입어 6년 전 왕위에 오른 이 젊은 국왕은 잔존하는 극우파의 압력과 좌파 급진세력과의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중도노선을 걸어왔었다. 우파로부터는 성급하다는 비난, 좌파로부터는 과감하지 못하다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정치범을 석방하고, 언론자유를 부활시키고 서구식 의회제도를 도입했다. 그동안 군부노장층의 정치개입 개연성, 과격한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대학생의 전국시위, 「프랑코」체제의 향수를 가진 극우파의 잇단 위험 등 혼란과 폭력사태의 빈발에도 불구하고 군을 자제시켰고 서, 「유럽」 제국과의 외교를 강화해 82년부터는 EC가입도 약속 받았다. 민병대의 인질이 됐다가 풀려 나온 의원들에게 「마드리드」 시민들이 『자유만세』 『민주만세』를 외친 것은 이미 「스페인」 국민에게 움직일 수 없는 민주화의신념이 도사린 증거라 하겠다.
둘째로 비록 「프랑코」 총통 때의 유산이라 하겠으나 「스페인」 국민의 경제적 안정이다. 73년의 1차석유 「쇼크」로 「스페인」 경제가 어려운 고비를 맞은 것은 사실이나 이미 80년「스페인」의 1인당 GNP는 4천7백58「달러」 에 이르렀다. 「프랑코」 총통사후 5년 만에 꼭 두 배가 된 것이다. 현재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인플레」로 고민하고 있으나「유럽」각 국으로 진출한 노동자들의 송금이 있고 막대한 관광수입이 있다.
영국 「K· 홉킨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0년 이후 12년 동안 전 세계에는 2백 건 이상의 「쿠데타」 가 발생했는데 1인당 GNP 1백5 「달러」 이하의 국가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고, 8백12 「달러」이상의 국가에선「쿠데타」가 거의 없었다. 작년에 군부정치로 회귀한 「터키」 의 경우만 예외로 한다면「스페인」은 이미「쿠데타 잠재국가」에서 탈피한 것이다. 저개발국의「쿠데타」는 GNP의 명목상 상승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본질적인 만족도가 그것을 하회할 때가 대개 그 원인이 되었다고 이미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경제적 안정으로 마음이 부푼「스페인」국민에게 철권정치로의 복귀는 국민의 의식이 허용치 않은 것이라 하겠다.
이제「스페인」의 난제는「바스크」분리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있다.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스페인」과「프랑스」에 흩어져 살고있는 2백70만의「바스크」족은 인종·문화양면에서 「스페인」과 다르다. 자치를 요구하며 「테러」까지 서슴지 앉는 이들에게「카를로스」국왕은 자치를 인정했으나 24일의 민병대처럼 이들의 분리를 반대하는 세력이 저항하고있다.
결국 시대착오적인 「프랑코」 주의자들의「쿠데타」위협을 극복한「스페인」정국은 오히려 군부의 강력한지지, 특히 젊은 장교들의 정치 부 개입 신념에 힘입어 다시 한번 민주화의 토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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