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렸던 아기를 다시 찾는 마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전에 내가 한 동네에 살던 어떤 젊은 부인은 결혼 10년이 가까워도 아기를 갖지 못했었다. 차분하고 곱게 생긴 그 여인의 얼굴에서 가끔 나는 깊은 우환를 볼 수 있었다.
건강하고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면 누구나 당연히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그 부인에게는 해당돼지 않았었다.
모든 것을 같고 있고 얻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그 부인에게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은 엄청난 비극이고 안타까움이었다.
옆의 집 마당에 새하얗게 널린 아기 기저귀가 바람에 날리는 것만 봐도 가슴이 섬짓하게 저려온다는 말도 했다.
또 백화점에 가서 아기들 장난감 파는데나 아기 옷 파는 점포 앞은 눈물이 쏟아져 외면을 하고 지난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절박한 여자의 마음 같았다.
그런 여자의 마음은 정말 그런 처지에 있는 당사자 아니면 누구도 그 마음을 대신 아파 줄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어느 해 추운 겨울 밤 그 집 문안에는 나은지 일주일도 안된 것 같은 여자애를 강보에 싸서 넣고 간 사건이 일어났다. 그 초라한 아기 웃저고리 안에는 아기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자기 자식을 버리고 울고 갔을 마지막 모정의 표지였다.
그 다음날부터 그 집 마당에는 그렇게 부러워하던 아기 기저귀가 평화롭게 바람에 날리고 삭막하고 썰렁하던 그 부인의 방은 온통 아기의 우유냄새 또 아기의 물건으로 채색되어 갔다. 동네에서는 경사 났다고 모두 아낌없이 축복해 주었다. 매일 나른하고 권태로운 표정이었던 그 부인의 얼굴은 아기를 얻은 날부터 활기에 차고 매일이 신바람이 났다. 아기가 젖을 토한다고 뛰어오고 푸른 똥을 눈다고 병원으로 엎고 뛰는 때도 있었다.
동네 엄마들도 이 축복을 모두 관심을 두고 지켜보면서 이 서투른 엄마를 돌봐 주었다. 인형같이 예쁜 아기는 토실토실 커 갔다. 그러나 나는 그 아기를 볼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 추운 밤, 남의 집 대문 안에 자기애를 넣고 울면서 도망가 버린 그 엄마가 자꾸 생각이 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있는 여자의 마음을 나무라기에 앞서 그렇게 해야만 했던 한 여자의 비운을 가슴아프게 생각했다. 자기 애 룰 버려야만 하는 경우 룰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철없는 불장난 끝에 온 사실을 감당 못해 버리는 경우, 즉 요새 유행어 같이 나도는 미혼모란 말이 해당되는 경우일 것이다. 또 너무 가난해서 애를 더 기를 능력이 없어 버려야만 하는 경우-. 이것은 무지이면서 조금은 동점이 가는「케이스」일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한가지 실수는 절실히 원하는 집에 애를 못 주시고 원치도 앉고 바라지도 않는 곳에 아기를 점지하시는 그 실수 말이다. 인간의 생명은 축복 받는 데만 태어나야 그 생명이 떳떳하고 가치있는게 아닐까? 인간이 인간을 버릴 수 있는 행위-. 남녀의 애정의 경우도 누가 누구를 버렸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정과 생각의 소산이니까 누가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생명은 스스로 선택할 수 는 없으나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어른의 마음과 행동은 벌써 인심이 아니고 수심인 것이다.
며칠 전 자기애를 버렸던 부모가 친권을 내세우고 입양간 애를 다시 달라는 기사를 읽었다. 버려야만 했던 그 때의 행위, 또 다시 찾고 싶은 절박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앞서 너무나 자기들 마음대로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의 생명은 길에 버렸다가 다시 주울 수 있는 나무토막은 아니다.
아기가 없던 집에서 아기를 얻은 기쁨에 젖어 있을 그 선량한 사람들에게 또 한번 죄를 지울 수 있을까?
15개월 동안의 정성과 사랑·모정을 친권이란 법전의 단어로만 뺏을 수 있을까? 친권을 앞세우기 전에 친권을 버릴 수 있었던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를 가질만한게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