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백년 익힌 솜씨로|막걸리를 빚어내다-부산시 금성도「농주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술을 놓고 우리데「맛」과 「멋」을 얘기할 때 첫째로 막걸리를 꼽는다.
인삼주·죽엽주·도화·두견·국화주…. 철 따라 지방 따라 한국의 명주는 수없이 많지만 막걸리를 가장「한국적」인 술이라고 한다.
매끄러운 장관보료 위에선 제 맛이 안 난다. 산해진미 안주가 막걸리엔 역겹다. 싱그러운 풀 내음과 퀴퀴한 두엄 냄새가 나는「포플러」나무 밑이 제격이다.
고봉으로 담은 시커먼 보리밥을 고추장에 썩썩 비벼 새참으로 뚝딱 해치우고 텁텁한 목일랑 주발에 철철 넘치게 막걸리 한 사발을 꿀꺽 꿀꺽 들이킨 뒤 갓 따온 풋고추를 원장에 푹 찍어 어적어적 씹으면 그게 바로 감로수다.
매미·쓰르라미가 악을 쓰고 우는 그늘 밑에 불룩 솟은 배를 배꼽째 드러내고 식곤증을 풀라치면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리 없다. 우리네 살아가는 멋과 맛이 막걸리의 취흥에 그대로 실려있다.
막걸리도 여러 번 변했다. 한때 밀가루·옥수수·고구마·보리쌀을 거쳐77년 쌀 막걸리 맛을 보게 되더니 1년만에 이내 그마저 중단되었다.
이같은 변환 속에서도 고유한 서민의 맛을 3백년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있다.
부산시 동래구 금성동「농주 마을」
별칭「산성 막걸리」로 이 고을은「산성 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막걸리의 수난과 변천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맛을 지켜온 이 마을도「밀주」와「묵산주」의 틈바구니를 헤쳐온 시련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동안 주민들이 흘린 눈물과 쌓인 애환을 혀끝에 느끼지 못할 땐「술맛을 모르는 뜨내기 술꾼」이 되고 만다.
산성 막걸리의 맛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이조 숙종 때인 1703년. 전장17·5km의 산성(사적2l5호)가운데 중성 4km를 축성할 당시 영남일대에서 차출된 부역꾼 5만여명에게 낮 참으로 먹인 이곳 막걸리가 별미로 소문나게된 것이 시초다.
이 마을에서 술을 빚은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
오·장·김씨 3성이 3백여년 전 이곳에 정착, 개간을 했으나 토질이 악해 추수는 3개월 양식뿐이었다. 살아 남기 위해 손을 댄 것이 누룩 만들기.
오늘의 별미는 바로 좋은 물과 좋은 누룩의 소산이다. 해발 8백m 고지에서 솟아나는 산성 마을의 물은 구한말 30리 떨어진 곳에서 동래부사가 군졸을 시켜 날라다 마실 정도로 정결하고 맛이 있다.
예부터 술 만드는 여섯 가지 재료를 6재라하여 이 가운데 누룩을 첫째로 쳤다. 이 마을의 누룩은 노르스름한 곰팡이가 슬고 고소한 냄새가나는 황??균 누룩. 본래가 특산품으로 한때는 만주·일본에까지 팔려나가던 명품이었다.
스무마리 마소가 아침 일찍 누룩을 지고 마을을 내려가면 저녁때면 누룩 만들 밀을 그만큼 싣고 올라온다. 집집마다 아낙들은 밤새워 맷돌질을 하고 가루가 된 것은 다음날 구시(나무반축통)에 넣어 반죽을 한다.
반죽한 것은 정성껏 힘있게 밟아 모양을 떠야 한다. 외씨 같은 맨발로 동네 큰아기 8명이 한조가 되어 구른다.
한번 눌러「큰 거랑」(대천)이 생기고 두 번 굴러「작은 거랑」(소천)이 생기면『베틀가』곡조에「누룩 디디기」가 이어진다.
『큰 거랑·작은 거랑 사시사철 넘나들다/달걀같은 내 뒤꿈치 밭두렁이 되누나/이 누룩 빚은 술 어느 님 마실까만/주흥에 답 못하는 이내 몸만 늙누나. 』누룩 디디기에 혼기 놓친 노처녀의 탄식이 막걸리 맛만큼이나 쌉스름히 저려온다.
산성 막걸리가 양성화된 것은 3년전. 군수 사령관 시절의 산성 막걸리를 못 잊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전통 보존 지시에 의해서였다.
단 조건은 쌀로 술용 빚되 개인 집에서가 아닌 마을 공동 양조장에서 주조해야되고 또 마을 밖으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휴일이면 맛을 찾는 행락객이 1만여명이나 찾아든다. 한말에 1만2천원 하는 막걸리가 1백50말씩 팔린다.
이 마을 조합 대표이사 이춘식씨(60)는『맛에 취하면 얼음을 깨듯 설미가 들고 마을의 내력을 알고 마시면 선미의 지경에 이른다』고 자랑이다.
손님 중엔 30년이 넘는 고객이 허다하다. 서면에서 손자 놈을 데리고 산행했다는 김봉수 할아버지(60)는『산성 농주 맛 때문에 죽기가 억울하다』며 콧수염에 묻은 막걸리를 털어 낸다. <동래=진창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