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열리는 산수유-전남 구례군 산동면 원촌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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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구 밖 큰 길에서 마을 안 샘터까지 양편 10릿길. 돌담마다 밭둑마다 지천으로 자란 산수유 (산수유)나무가「아치」를 이룬다.
노고단(노고단) 을 등에 업고 지리산맥에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 전남 구례군 산동면 원촌마을-.
계곡을 타고 내리는 매서운 바람이「산수유 마을」의 긴긴 겨울밤을 사정없이 할퀴어도 화톳불 훈훈한 토방에선 큰아기들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지게 퍼진다.
『오드득 똑, 오드득 뚝』앵도같은 큰아기 입술이 숨바꼭질 할 때마다 보석알 같은 산수유 과핵(과핵)이 함지박에 쌓인다.
벼이삭이 누렇게 익는 9∼10월 추수 때가 되면 산수유 열매도 새빨갛게 결실을 본다. 도리깨질도 안되고 키질도 안 된다. 한알 한알 입으로 깨뜨려 과육(과육)과 씨를 발라내는 것은 여간 품이 드는 일이 아니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할머니도, 그 손녀들도 예부터의 전통을 밤새워 한다. 어느 처녀의 선창(선창)인지 모르게 이어지는 산수유 남도 (남도)가락-.
『산동 큰애기가 입맞춘 산수유/그 열매 달여먹은 떠꺼머리 수총각/오줌발이 듣는다….』 지루함을 잊으려고 흥얼거린 마지막 대목에 처녀들은 또 한번『까르르』웃어댄다. 해열·보혈·강장제로 또는 유정(유정)·요통을 다스리는데 한방에서 감초 다음으로 널리 쓰이는 약재가 산수유다. 산수유 약초는 산동 큰아기들이 이처럼 일일이 입으로 씨를 발라낸 열매 살을 말린 것. 어쩌면 처녀의 입김과 약효가 무관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옛 가정에서는 상비약으로 한두되 쯤 삼베에 싸 해를 묵혀 걸어두었다 『아이들 오줌 못가릴 때, 며늘아기 산후가 좋지 않을 때, 남정네들 기운 없을 때 한 사발 달여 먹이면 그 자리에서 즉효여-』이웃 광의면에서 12세 때 시집온 김씨 할머니(80)의 말이다.
설탕에 쟁여놓으면 혀에 울려 달짝지근하고. 빨면 새콤한게 어른들 눈을 피한 아녀자들의 주전부리감.
차로 끓여 마셔도 산뜻한 산미(산미)와 그윽한 향운(향운)이 보양을 정해 사라져 가는 우리네 옛 맛을 찾게 하여 국산차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산수유 연간 생산량은 12만kg.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산동면에서 산출된다. 단연 국내최고의 생산지다.
『전해오는 말로는 고려 중국 산동성에서 귀화해 온 사람이 처음 가져와 심었다고 하지만 확실치 않아요. 아뭏든 동네에 3백년 넘은 고목이 10여 그루 있는 걸로 미루어 산수유 역사는 그쯤으로 추정하지요』주민 김상옥씨(68) 는 산동 산수유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산수유나무는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활업교목(교목)으로 중국 산동성이 원산지. 키가 3m정도로 3∼4월이면 4개의 꽃잎이 한 줄로 소복이 피어나 온 마을을 샛노랗게 뒤덮는다.
1천4백여 가구 집집마다 울타리·논두렁·밭둑·개울가에 적으면 10여 그루, 많은 집은 1백여 그루까지 산수유나무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자연생이며 일부만이 10여년 전부터 산수유가 돈이 되면서 심은 것이다.
예전엔 자연생 나무에서 소량을 따서 가용으로 쓰거나 몇몇 약재상들이 채취해 대구 약령시로 내갔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던「천한 나무」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산골마을의「달러·박스」.
지난해 산수유로만 2억여원의 소득을 올렸다. 근당 시세는 3천∼3천2백원. 나무에 따라 다르지만 적으면 한 그루에 10∼30근, 많을 땐 80근까지 열매가 달린다.
산동마을 의에도 경기·충남 등지에서 생산되나 살이 두껍고 알이 골라 산동산이 최고. 동남아에서도 중공산보다 품질이 좋아 산수유에 관한 한 구례 산동이『세계 제1』이란다.
산수유가 잘 자라는 토양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사질양토), 물이 많고 비옥한 땅에서는 오히려 성장이 늦는 박토 기호성 식물. 같은 지리산 기슭이면서도 산동면의 서남부 하동이나 문척 등 다른 면에서는 거의 산수유가 자라지 않고 옮겨 심어도 열매 질이 훨씬 뒤떨어진다.
주민들의 애로는 수확걸이 한참 바쁜 추수 때와 겹치는 것. 『요즘 큰애기들이 씨뺄락 한당가. 몽땅 공장나 갈락하제』산동 면장 임길수씨(54)는 인력난 때문에 어차피 씨빼는 것이 기계화되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계곡의 눈이 녹는 2월이 되면 또다시 방울방울 피어오를 나무를 바라보며 산동 주민들은 우리네 고유 차가 다방 등에서 대량 소비될 날을 기대하고 있다.
『먼길 돌아가실라믄 산수유 짓이겨 거른 놈에 꿀을 섞어 끓인 산수유 죽 한 그릇 들고가시쇼. 내내 훈훈할 것이고만….』김씨 할머니의 소박한 정에서「산수유 마을」의 인심을 알 것 같다.【구례=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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