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한발씩 늦은 굵직한 경기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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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잘못 짚은 경기전망>
1929년 10월24일 소위「암흑의 목요일」을 기점으로 세기의 대공황은 시작되었다. 이 30년대의 대공황은 곧 전세가로 확산되어 근 4년 동안 세계경제를 마비시켰다. 공황이 절정을 이루었던 1933년 미국의 실업자는 1천3백70만 명에 달해 노동인구의 25%가 가두를 방황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학자들의 경제진단이나 신문보도들을 보면 장미 빛으로 차 있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직전에 발표된「후버」대통령의「경제 보고서」는 『우리경제의 앞날은 한없이 밝다. 충족 돼도 충족 돼도 새로운 수요가 무진장으로 솟아 나온다』는 것이었다.
대공황이 시작되어 주가폭락사태가 나고 나서도 『주식하락과 경기후퇴는 결코 불황의 징조가 아니다』(29년 11월2일)고 보도되었다.
그후에도『20, 21년과 같은 극심한 불황은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11월10일),『불황이 일어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내년 봄쯤엔 경기회복이 기대된다』(12월21일),『현재의 경기는 바닥을 친 느낌이다』(30년 1월18일),『경기전망은 매우 양호하다』(30년 3월29일),『현재의 불규칙한 경기의 움직임은 경기회복으로 가는 진통이다』(6월28일),『경기하강은 종점에 가까 와 오고 있다』(11월15일)등과 같은 보도가 잇달아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지만 당시는 그렇게 믿었다.
만약 경제학자들이나 신문이 좀더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판단하여 올바른 보도를 했더라면 사정이 좀 나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볼 수 있다.
금년 경제면보도를 되돌아 볼 때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작년 10·26사태 후 미개유의 경제난국이 가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문보도들은 『경제활동 정상 되찾아』『사회혼란에도 불구하고 저축 대폭 증가』『하반기엔 경기가 회복될 것』『LC 늘고 수출호조』등 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부의 생각도 그런 방향이었다.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과 국내의 여러 격변이 겹쳐 경제가 위축될 것이란 예상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마이너스」성장으로까지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소문을 확인하라"
때문에 1월12일 환율을 현실화하면서 금리를 대폭 올렸다. 호황 때나 쓸 수 있는 정책을 용감하게 쓴 것이다. 이때 환율이 오를 것이란 소문이 증시언저리에서 미리 유 포되어 웬만한 사람들은 미리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증시에서 그럴싸한 소문이 퍼지면 얼마안가 경제조처가 발표되는 바람에 『항상 증시를 「체크」하고 「루머」에 조심하라』는 교훈이 생기게 되었다. 그후 그 정도가 지나쳐 토요일이나 월말이면 으레 통화개혁이니 사채동결 같은 끔찍한 「루머」들이 나돌아 이의 확인에 골치를 앓곤 했다.
턱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워낙 소문이 많이 맞아 들어갔는지라 일소에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총리나 재무장관도 『사채동결이나 통화개혁은 절대 않는다』는 기자회견을 자주 해야 했다.
사실 그후의 조사에서 l·12조처직전 많은 기업들이 환투기를 한 사실이 적발되어 환율인상작업의 보안이 철저하지 못했음이 확인됐다.
경제정책 중 최고의 비밀에 속하는 환율인상이 미리 유 포됨은 물론 신문에까지「정부, 국제수지관계 곧 모종단안」이란 기사가 1면 톱으로 나가는 이변까지 낳았다.
환율인상은 경제여건으로 봐서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확증이 잡힌 것은 연초 경제각료들의 잦은 회합 때문이었다. 1월9일 하오 장덕진 경제과학상임위원과 김만제 KDI원장이 청와대에 장시간 보고를 한데이어 신현확 총리주재로 경제「팀」들의 구수 회의가 열렸고 10일엔 정재석 상공장관과 이경식 청와대경제수석이 김원기 재무장관실을 방문한 후 김 재무가 큰 서류봉투를 들고 이한빈 부총리를 찾았다.
이런 부산한 움직임들이 모두「캐치」되어 환율인상은 아예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환율인상 등과 같은 극비조처를 너무 우유부단하게 했기 때문에 큰 혼란을 빚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그후엔 모든 일이 너무 전격적으로 처리되어 초기의 우유부단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무감각해진 소비자>
금년만큼 충격적인 일들이 많이 터진 것도 드물 것이다. 기업체질개선대책·중화학정리·유가인상·쌀값·비료값인상·환율유동화 같은 충격적 조처들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때문에 옛날 같으면 깜짝깜짝 놀랄 일도 예사로 넘길 수 있는 여유들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신문사의 편집회의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오늘 쌀값 인상발표가 있습니다』『얼마나 올리는데요』『12·2%입니다』『그것밖에 안올려요』하는 식이 되었다.
지난11윌19일 금년 들어 세 번째로 석유 값을 12·5%올렸을 때도 『그 정도라면 1면 「톱」감이 안되지 않아』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두들 느긋해졌다.
지난1월22일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기획원을 연두 순시했을 때 금년에 실질성장률이 3∼5%, 물가상승률이 27∼28%정도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정부는 2차「오일·쇼크」 때문에 경제가 다소 어렵지만 견딜 만 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때문에 경제계에서 먼저 죽겠다고 비 오를 질러도 으레 있는 「업자의 엄살」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 경제계는 그동안 엄살을 다소 애용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인데 그것이 엄살이 아니고 진짜란 사실을 알았을 땐 사태가 매우 심각히 된 후였다.
금년의 큰「이슈」였던 「컬러」TV를 둘러싸고 연말에 또 한번「업자의 엄살론」이 벌어졌다. 재고누증 때문에 빈사직전이라고 비 오를 지른 지 며칠만에「컬러」TV 품귀소동이 나자 정부는 그것보라는 듯이 엄살 론을 펴는가 하면 가전 업계에선 『거의 빈사지경까지 몰고 가다 갑자기「컬러」방영을 결정해 놓곤 우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원망하고 있다.

<「골프」도 한때 쟁점>
「엄살론」을 둘러싸고 정부당국과 경제계는 일찍부터 한바탕 논 전을 벌였다.
즉 지난4월4일「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제정책토론회에서 김만제 KDI원장이 『부실기업은 치부를 드러내서라도 과감히 정리해야 하며 지난날과 같이 개별기업을 지나치게 육성·지원하는 것은 시정돼야 한다』고 먼저 포문을 열자 심한 반발을 받았다.
금년 들어서 원색적인 용어가 많이 쓰이는 것이 한 경향인데 이것도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다. 경제4단체장들은 5월28일 당시 박충훈 총리를 방문, 『경제난이 심각하니 이를 타개하기 위한 중대결단이 시급하다』고 요청했으나 예의 교과서적반응만 얻었을 뿐이다.
지난 상반기엔 노동쟁의가 치열해져 사북 사태 같은 극한적인 소동이 벌어지자 경제계에선 종래와 같은 분열을 지양하고 자유경제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공동방안을 마련하자는 데까지 진전되었다.
이 밀월의「무드」가 고조되는가 했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걷잡을 수 없는 격변이 거듭되자 모두들 자기살길을 찾아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숙 정의 소용돌이 속에선 수신교과서 같은 기업윤리요강이란 것도 내놓았다.
이때 가장 쟁점이 된 것은『「골프」를 칠 것인가 안칠 것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엔 『「골프」를 일체 치지 않는다』는 행동강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심하다는 이의가 나와『내기「골프」는 안친다』로 완화했다가 결국은 『여가생활을 건전하게 하자』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결국「골프」는 쳐도 좋다는 것으로 공인된 셈인데, 무엇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젓고는『건전한 운동인「골프」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워낙 기업의욕이 침체되어 전두환 대통령은 20여명의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안심하고 경제활동을 하도록 격려까지 했다.
그동안『잘 돼 간다』는 보도만 하더니 갑자기 「마이너스」성장 운운은 무슨 영문이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게 됐다.
30년대 대공황 때의 신문보도가 거듭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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