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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모병제 입씨름에 앞서 군 혁신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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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소련이 무너지던 1990년 내에 나돌았던 풍자 우화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새로 만든 다리를 지나던 고위층이 ‘ 경비 군인도 없나’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군에서 병사를 한 명 보내 다리를 지키게 했다. 곧 교대병이 필요해졌고 야간근무병과 주말근무병이 추가됐다. 규모가 커지자 아예 부대 막사가 별도로 세워졌으며 이들의 의식주를 책임질 취사·피복·건물관리 담당이 보충됐다. 부대를 지원할 통신·병참·수송·정비 관련 부대가 더해지고 의무대도 생겼다. 그러는 동안 경비병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계속 다리를 지켰다. 근무를 서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우화는 소련 붕괴의 원인이 됐던 비효율적 관료주의, 조직 비대의 타성, 혁신의 지체 등에서 찾았다. 기업에서는 이런 진단을 경영활동에 적극 참조했다. 불필요한 인력, 불합리한 구조,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있는지를 항상 살피고 비용 대비 효과를 따졌으며 혁신을 강조했다. 군이 ‘졸면 죽는다’라는 구호를 외칠 때 기업에서는 ‘혁신을 중단하면 망한다’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문제는 지금 우리 군이 처한 현실이 이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군 출신의 한 군사전문가는 “지금 군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근본적인 이유는 그동안 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군이 위기에 처한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혁신적인 조치로 정예강군으로 가는 로드맵을 내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작전을 전공한 다른 군사전문가는 “특히 군의 병력 수요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한 민·군 전문가 집단의 연구와 이를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7세기 수나라가 113만3800의 병력과 그 두 배나 되는 군량미 운반 민간인을 동원하고도 살수대첩 등 고구려에 패한 것, 당나라가 안시성을 포위하고도 3분의 1에서 10분의 1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성민들에게 호되게 당한 것은 전투병력과 지원병력의 비율에 비밀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투병력과 지원병력의 비율이 수나라나 당나라가 2대 8이었던 것에 비해 고구려는 8대 2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등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우리 군이 당시 수나라나 당나라 수준인 2대 8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비전투 분야 업무 중 취사·피복 등 민간에게 위탁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웃소싱하고 시스템을 개혁하면서 필요 병력을 다시 계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지금 군은 위기다. 10여 년 만에 구타 사망 희생자가 나오면서 군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군이 노력한 다른 사례는 무시되고 실수한 상황만 증폭돼 여론이 악화하는 위기 상황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지고 있다. 이에 대해 모병제로는 병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며 천문학적인 비용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재로도 의무복무 기간이 줄면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징병검사 대상자의 대다수가 현역으로 입대하면서 병력 자원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그러니 아웃소싱과 전투 분야 병력 집중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군 개혁을 위한 국회의 이해와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얼마 전 군의 PX조직을 민간기업에 아웃소싱하고 수천 명의 인적자원을 전투원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그러나 국회는 PX 납품 중소업자들의 생계를 고려해야 한다며 이를 처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민간의 이익을 핑계로 군 개혁을 유보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한때 군이 민간의 잉여물자 처리장이 된 적도 있었다. 민간에서 양파가 남아돌면 양파를, 구제역으로 돼지고기가 안 팔리면 돼지고기를,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남아도는 닭고기를 군에서 대량으로 먹어줘야 했다. 군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대량급식 대상자로 여기는 일부 정치인도 군의 개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개혁하지 않은 군은 허리 살만 찔 뿐이다. 그러면 국가 안보와 국민 보호가 어려워진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