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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숲길' 따라 걷다 보니 문득 깨달음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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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사로 가는 300여m의 `천년의 숲길`엔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광경을 펼친다.

지난해 9월 소설가 최인호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중 가끔 생각나는 소설이 1993년에 읽은 『길 없는 길』이다.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선사와 제자 만공 선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이름만 들었던 봉곡사를 그해 겨울 처음 찾아갔다.
만공 선사가 도를 깨달은 곳이 내 고향인 온양의 봉곡사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기 때문이다.

봉곡사는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작은 고찰이다. 봉수산에 등산객이 몰리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마을을 지나 절로 오르는 300여m의 소나무 숲길은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좀 과장해 ‘천년의 숲길’이라고 이름 붙인 이 길은 그저 걷는 길이 아니다. 걸으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 길이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조금씩 느낌이 다른 아름다운 숲길이다. 이 숲길의 장대하고 멋진 소나무 중 상당수는 일제가 연료 추출을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생긴 상처를 갖고 있다. 다행히 아산시에서 10년쯤 전에 치료한 뒤 생각보다 빨리 아물고 있다. 요즘은 일부만 눈에 띈다.

우주 삼라만상 모두 하나 ‘만공탑’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뜻을 담은 만공탑.

소나무 숲길 끄트머리에 이르면 정면 둔덕 위에 만공탑이 있다. 높이 4m가 좀 넘는다. 2단의 연화대좌 위에 동자 셋이 연꽃무늬를 두른 받침돌을 떠받치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받침을 올렸다. 맨 위의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돌에는 만공 선사의 글씨 ‘世界一花(세계일화)’가 새겨져 있다. 1945년 광복 이튿날 무궁화 한 송이에 먹을 묻혀 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존재, 모든 나라,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라는 의미다.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만공은 법호, 월면은 법명이다. 만공은 1883년 공주 동학사로 들어가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그곳에 들른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로 갔다 은사로 출가했고 경허를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893년 만공은 어린 승려가 들러서 경허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의 뜻을 묻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를 공안(화두)으로 잡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이르게 된 곳이 봉곡사였다. 봉곡사에 자리 잡고 용맹정진해 마침내 2년 뒤인 1895년 7월 25일(음력) 깨달음을 얻고 아래와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 이치와 기운이 고금 밖인데)
白雲淸風自去來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何事達摩越西天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오르네)

만공은 깨달음을 더욱 벼리기 위해 봉곡사를 떠나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계속 정진하던 중 스승 경허가 들렀을 때 무(無)자 화두를 받았다.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던 끝에 31세 때인 1901년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크게 깨닫고 천장사로 돌아갔다. 이후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은 만공은 경허의 수제자 ‘삼월(三月)’ 중 한 명으로서 수덕사를 중흥시켜 덕숭문중이 태동하게 됐다. 만공과 관련해 많은 업적과 일화가 전해진다.

경허 수제자로 수덕사 중흥 이끌어

봉수산 북쪽 자락에 위치한 아담한 봉곡사는 현재 마곡사의 말사로 조계종 사찰이다. 오랫동안 석암사(石菴寺 또는 石庵寺)라 했다. 신라 말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여러 부속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꽤 큰 절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1647년에 다시 짓고 정조 18년(1794)에 중수해 봉곡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2단의 돌 축대 위에 세워진 대웅전.

봉곡사라는 이름으로 바뀐 이듬해 또 다른 인연이 봉곡사를 찾았다. 당대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만공이 깨닫기 100년 전에 다산이 찾아왔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진 관료였지만 천주교 신자였기에 여러 차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형 정약전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의 입국과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정약용은 찰방으로 좌천됐다. 그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 있던 금정역에서 몇 개월간 근무했다.

 정약용은 남인 계열이었고, 성호 이익(1681~1763)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익의 제자 이삼환(1729~1813)이 당시 예산에 살고 있었는데, 정약용이 편지를 보내 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제안했다. 정약용이 모임 장소로 택한 곳이 온양 석암사, 즉 이곳 봉곡사였다. 정약용이 도착한 것은 1795년(정조 19년) 음력 10월 26일이었다. 이튿날 봉곡사에 당도한 이삼환·이광교 같은 13명의 학자가 열흘 동안 강학회를 열었다. 불교 사찰에서 유교 문집 정리가 이뤄진 특별한 일이었다. 정약용은 봉곡사를 ‘온양 서암(西巖) 봉곡사’라고 했고 당시의 일을 ‘서암강학기’로 남겼다.

봉곡사 대웅전 전경.

작지만 유서 깊은 사찰

봉곡사는 작은 절이다. 들머리에서 보이는 모습이 절집 전체다. 본래의 절은 수백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정유재란 후 중창 때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기본 방향은 동남향이다. 2단의 돌 축대 위에 근래 새로 지은 향각전과 대웅전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어서 직각으로 문수전과 요사(생활공간), 고방(창고) 건물이 배치됐다.

 정유재란 후 1647년 중창 때 지은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충청 지역 특징에 따라 칸 사이가 넓어서 안정적이며 앞면 3칸 모두 각각 두 짝의 만살청판 분합문을 달았다. 앞면 네 기둥 위에만 1출목의 공포를 결구해서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중앙 불단 위에 목조 석가여래좌상 한 분만 모시고 있다. 높이 1m 남짓한데 몸체에 비해 머리가 좀 큰 편이고,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조성 시기는 불명확하나 조선 전기라고 전해진다.

 봉곡사에는 ‘관음도’ ‘신중도’ ‘영산회산도’ 같은 3점의 중요한 불화가 있었다. 이 중 신중도만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확인돼 2011년 조계종단에서 일본 정부에 반환을 공식 요청해 놓은 상태다. 나머지 2점은 분실돼 소재를 알 수 없다.

 문수전 뒤에 고방과 요사 등이 ㄷ자 형태로 이어져 전체적으로는 약간 어긋난 ㅁ자 형태가 됐다. 문수전은 아래는 방이고 위는 다락 형태인 2층 구조이며 위층 바닥은 마루로 만들어져 있고 창문을 달았다. 밖에서는 높게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천장이 낮아 안온하다.

 문수전에 문수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약간 숙인 모습 등 전체적으로 봐선 대웅전 석가모니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수보살상 몸 안에서 여러 가지 복장품이 발견됐는데 대부분 도난당했다.

 문수전에 이어진 북서쪽 모서리의 고방은 앞면 3칸, 옆면 2칸인데 내부가 2층 구조여서 비교적 높은 편이다. 고방 건물은 여러 면에서 특이한 구조여서 대웅전과 함께 충남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돼 있다. 멋진 소나무 숲길 위의 아담한 봉곡사는 소중한 불교 성지로서 뜻 깊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경석 교사
1960년 충남 아산 출생. 강원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34년간 고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아산의 향토사학자다. 현재 온앙고에서 근무 중이다. 순천향대 부설 아산학연구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지방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산 인물록』 『아산의 입향조』 『종곡리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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