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4)제71화 경기 80년(12)하정 여규형 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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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정 여규형 선생(1849∼1922). 경성고등보통학교의한국인 교사 중 당대의 석학을 꼽으라면 단연 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인 교사의 민족적 차별 속에서도 한학의 독보적 존재로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호탕한 성품으로 학생들간에 숱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그는 1907년 6월1일 관립한성고등학교에 부임한 이래 l921년8월8일 고령으로 퇴직할 때까지 만14년 동안 재직했다.
그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를 사원, 호를 하정이라 하였다. 1848년 서울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한문에 점진하여 1882년 임오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그가 처음취임한 곳은 통리아문(이조말기의 관청·외무에 관한 일을 맡았음)소속의 동 문학이었다.
그 후 글 잘하는 것이 이름나1883년 박문국(인쇄출판기관)이 신설되자 담당주사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에 가담했던 신기선을 심문할 때 그 기록을 맡았는데 글씨 쓰는 것이 나는 듯하여 보는 사람이 떠들썩 했다한다.
그 후 승지·시종원 비서감우승·궁내부관제조사위원 겸 제용원 상의사장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시·서·화에 모두 능통해 살아있는 사문류취로 일컬어진 그는 부제학(정 삼품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한문학교과서』(1907년)의 감수자였고 1907년을 전후하여 발간된 『야뇌』라는 잡지의 기고가였다. 때때로 문학회를 열기도 했다.
1910년 6월17일 그가 창동 화악원에서 연 문학회에는 당시의 거물급 인사들인 조중응 농상공부대신·박제빈 경학원부제학·서상훈 수학원장·「구니와께」공소원장·「다까하시」한성고등학교 학감 등이 참석할 정도였다.
그는 「다까하시」에게 한문을 가르쳐 후에 대성케 하였고, 1916년 오세창·장지연등과 대동시선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 광대들이 부르던『춘향전』을 중국의『서상기』문제를 모방, 희작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 『하정집』을 남겼다.
그는 때때로 학생들 앞에서 거침없이 일본인에 대한 욕을 하였으나 워낙 한학의 대가인지라 일본인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이처럼 한학에 있어서 당대의 석학이었던 그는 우리학교 한문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굉장한 애주가였다. 그래서 아침 강의시간에도 술 냄새가 교실에 번질 정도였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보행이 부자유스러워 언제나 출퇴근 때에는 고색창연한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심부름하는 소년에게 그의 독특한 술안주 약과가 들어있는 손가방을 들려 다녔다.
수업시간이면 한문으로 작문을 짓게 하고는 가끔 교단에 철버덕 주저앉아 졸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언제나 내 작문점수는 9점 이상이었다 (당시는 10점 만점 제 채택). 그래서 한번은 작문 지에다 단 두 줄만을 적고 제출했다.
결과는 마찬가지로 9점이 아닌가. 이유를 알 수 없어 궁금하게 여기던 중 그 해 정월 초에 세배도 드릴 겸 선생 댁을 찾았다.
정중히 세배를 드린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서『선생님, 지난번에는 작문을 두 줄 밖에 안 썼는데 9점을 주셨어요?』하고 물었더니 『이놈아, 내가 네 조부장도 잘 알고 춘부장하고도 친분이 두터운데 11점이라도 줘야지』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는 것이었다.
이 같은 친분의 혜택(?)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돌아갔는데 급장은 수고한다하여10점을 주고 누구누구는 친구의 손자, 혹은 사위가 된다하여 1점을 더한 11점을 주기도 했다.
아마 어린 너희들이 한문으로 작문을 하면 얼마나 잘 짓겠느냐는 선생의 뜻이 숨어있었던 것 같다.
『당시 경성고보에는 화재나 비상사태에 대비한 「비상호집」이라는 타종신호가 있었다. 말년의 선생께서는 50분 수업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어 자습을 시켜놓고 꾸벅꾸벅 졸다가 깨셔서 『이 얘 시간 안됐니? 이놈의 고스까이(소사)가 낮잠 자나보다』하고 역점을 내시며 쯔쯔쯔 혀를 차시더니 시간도 끝나기도 전에 교실을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땡땡땡땡」하는 2연타 식 비상호집 신호가 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전교생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집합했다.
그런데 선생께서 손을 저으며 쫓아 나오면서『아니야, 비상이 아니야, 내가 하학 종을 친다는 것이 너무 급해서 두 번 씩 잘못 친 거야』하는 바람에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이상 김성진 (18회·의학박사)동문회고>
하정 선생의 박학은 가끔 어린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가령 어류에 관한 이름을 칠판에 가득 써놓고 다시 어류로 만든 음식이름을 또 한 칠판에 가득 쓸 수 있는 박학 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경성고보에 재직한 것은 60대였고, 별세하기 바로 전년까지 재직하였다. 따라서 그는 70평생 가운데 마지막 14년 간을 사실상 경기를 위해 바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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