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금성 쫓겨난 마지막 황제, 일본 환대에 “천황 만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7호 29면

일본 육군대학 시절의 푸제(앞줄 왼쪽 두번째)와 룬치(왼쪽 첫번째). 앞날을 예측이라도 한듯, 표정이 심란해 보인다. 1943년 4월 23일 도쿄. [사진 김명호]

푸이(溥儀·부의)는 퇴위한 후에도 13년 간 자금성에 거주하며 황제 존호(尊號)를 유지하고 있었다. 1924년 10월 23일, 서북 군벌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의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했다. 총통 차오쿤(曹錕·조곤)부터 잡아가두고 국회를 소집했다. “황제 칭호를 영원히 없앤다. 푸이에게 평민 자격을 부여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86>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를 일본이 유혹했다. 궁지에 몰린 푸이는 일본이 내미는 손을 덜컥 잡아버렸다. 두 명의 부인과 유모, 동생들을 데리고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관에 잠입했다.

일본은 푸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푸이의 옛 신하들에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냉철하고 근엄한 당대의 명망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힘을 이용하면 다시 황위에 오를 수 있다”며 푸이를 부추겼다.

푸이도 일본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생들을 모아놓고 일본 칭찬 하는 날이 많았다. 황후 완룽(婉容·완용)이 기모노를 입고 나타나도 탓하지 않았다. 친동생 푸제(溥杰·부걸)가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가깝다는 이유로 동북 강무당(講武堂)에 입학하려 하자 만류했다. “동북에는 절대 가지 마라. 장쉐량은 흉악한 놈이다.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모른다”며 푸제와 처남 룬치(潤麒·윤기)에게 일본 유학을 권했다.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워라. 일본이 싫으면 영국으로 가라. 나도 영국 유학을 갈 생각이다. 영국 왕자도 내게 오라는 편지를 여러 통 보냈다.”

첫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룬 푸제와 일본인 부인. 연도 미상.

일본은 푸이에게 더 안전한 곳을 물색했다며 톈진행을 권유했다. 톈진에는 일본조계가 있었다. 1925년 2월 23일, 푸이는 톈진 주재 일본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패전후 총리가 됐다)와 공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톈진행 열차에 탑승했다. 이튿날 순천시보(順天時報)에 푸이의 근황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전 선통황제가 베이징을 떠났다. 동생들도 오늘 아침 톈진행 열차를 탔다. 한동안 톈진에 머물 것으로 추측된다. 최종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톈진에 도착한 푸이는 날이 갈수록 일본을 신뢰했다. 자신을 다시 황제 자리에 앉힐 외부세력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총영사 요시다는 신하처럼 정중했다. 하루는 일본인 소학교를 참관하자고 청했다. 거리에 늘어선 일본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나를 반겼다.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오랫만에 들어본 만세소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톈진 주변에서 군벌들간의 내전이 극에 달했을 때도 요시다는 푸이의 근심을 덜어줬다. 주둔군 사령관과 함께 전황을 보고했다. “황제께서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조계내의 각국 주둔군들이 연합군을 조직했습니다. 중국 군대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옵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첫 번째 내방객은 일본 공관원들이었다. 생일날도 푸이의 거처에 떼로 몰려와 만세를 부르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일본측의 환대에 푸이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천장절(일왕의 생일)이 되면 기념식에 참석해 ‘천황 만세’를 불렀다. 대본영에서 왔다는 일본군 참모의 중국사정 분석은 푸이를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중국의 혼란은 황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의 민심을 하나로 할 사람은 선통황제가 유일합니다.”

푸이는 푸제와 룬치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푸제는 부인 탕스샤(唐石霞·당석하)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상하이에 머물던 탕스샤는 소식을 듣자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한때 황제와 황제의 동생이었던 사람들이 꼴 좋다. 다시는 저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온갖 남자들과 어울렸다. 단, 일본인들에게는 눈길도 안 줬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했다. 일본 군부는 동북을 중국에서 떼어내기로 작정했다. 중국에 와 있던 특무기관원과 군인들을 동원해 푸이를 동북으로 이전시켰다. 푸이를 만주국 황제에 앉힌 일본 군부는 푸제를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시켰다. 정략 결혼이었지만 푸제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일본 군부는 푸이와 푸제를 이간질시켰다. 만주국 제위계승법(帝位繼承法)을 발표했다. 푸이의 의심벽이 발동했다. 의심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푸이는 유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푸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