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도시 떠나 30년…가끔 찾아오는 문우들이 더 없이 반가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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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인의 집 봉선화는 유독 붉었다.
울타리도 없는 마당 한쪽, 옷깃을 여미고 핀 봉선화는 도시에서 온 낯선 방문객을 왜 이토록 유심케 하는가. 절반은 줄기에 절반은 이미 낙화되어 땅위에 낭자히 흩어진 봉선화. 가을, 서편에 물들어 가는 놀과 문답이라도 하는 듯 봉선화는 그렇게 붉게 불타고 있었다.
대전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건강 때문에 대전을 떠난 지가 올해로 30년. 시인 한성기씨(58)는 그 30년 동안 줄 곧 시골에 묻혀 있었을 뿐 한번도 도시로 나온 적이 없다.
충남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68. 이곳에 자리정한지가 3년 남짓하다. 바다가 보이던 서산 근흥에 살다 국민학교에 재직중인 외아들 한용구씨(28·신도초등 학교교사)가 이곳으로 전근, 아들을 따라 이사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일, 적적한 산길을 걷는 일, 달빛에 홀려 하염없이 밤길을 걷는 일, 이것이 30년 동안 시인 한씨가 한일의 대부분이다.
봄이면 산수유부터 피었다. 차례로 피었다 지는 꽃들. 이웃이 아무리 개화를 서둘러도 제때를 기다려서 피는 꽃들. 무슨 지각이 있는 사람의 행위같이 결코 제 차례를 헛갈리는 일이 없다.
『「아카시아」꽃은 오히려 가벼운 사람 같아요. 밤꽃 때는 나무 밑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비릿하고 찝찔한 꽃내는 처음 어질어질 했지만 몇 해를 인이 박힌 뒤부터는 꽃철이 기다려지네요.』
한씨의 고백이다. 한씨가 낸『산에서』『낙향이후』『구암리』『늦바람』등 4권의 시집은 한씨의 고백처럼 모두가 농촌과 바다와 산을 노래한 시편들이다.
13평 남짓한 이 집엔 한씨 내외와 자녀라곤 아들 한 명뿐인 용구씨 내외가 산다. 좁은 마루에서 내다보면 밭이고 산이 온통 한씨 집 안마당처럼 펼쳐진다. 특별히 친분을 나누는 문인은 없지만 가끔 도시생활에 지친 문우들이 내동리를 찾는다. 외롭고 적적한 한씨에겐 사람이 온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운 일. 『초라하지만 나에겐 천국이에요.』 그렇다. 숨은 듯 한적한 이 시인의 집에 가을햇살은 더욱 풍성한 것 같고 세상의 온갖 행복 기쁨은 모두 피어 있는 듯 했다.

<김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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