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5)본의 아닌 망명생활...4·19로 귀국 정치색 없다고 한은총재로 발탁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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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필자소개>
배의환씨는 경남 김해출신으로 미「보스턴 노드이스턴」상대와 「뉴욕」대학원을 졸업하고8·15직후 귀국하여 재무차관과 금융조합연합회장을 지냈다. 그후 오랫동안 공직을 떠났다가 허정과도정부때 4대 한은총재로 취임하여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물러나기까지 3개월동안 재임했다.
한은을 떠나선 주일·주「아르헨티나」·주영대사를 거쳐 무역협회의 해외경제연구소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무역협회 자문위원직을 맡고 있다. 당년 74세.
60년4월19일. 「하와이」의 일간지 「스타·볼레틴」지의 편집국장「필리·앨런」씨가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의 이승만정권이 학생혁명으로 위태롭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얼핏 순간적이나마 만감이 교차했으나 『혁명의 시기가 오히려 늦은 감이었으며 혁명은 불가피한 귀결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얼마안있어 평소 친교가 두터웠던 조성철 중앙산업사장으로부터 즉시 귀국해달라는 장거리전화를 받았다. 자세한 사유를 일러주지 않아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예사로운 일은 아니라 싶어 짐을 꾸렸다.
김포에 내리니 조사장과 김용주씨등이, 마중을 나와 있었고 그 길로 과도수반이었던 허정씨자택으로 안내되어 갔다.
정치에 관련이 없는 금융인물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제야 나의 귀국이유에 대강 짐작이 갔다.
다음날 아침 모「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중부경찰서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이박사가 오늘 새벽 「하와이」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하와이」생활중 여러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정부의 비자발급 거부로 본의 아닌 망명생활을 해온 처지였는데 나를 못 들어오게 한 장본인이 이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니 참으로 인생의「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60년6윌.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4대 한은총재에 취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에서는 해외에 너무 오래 나가있어 국내실정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하튼 과도정부라는 특수한 여건아래서 나의 총재재임기간도 3개월로 지금까지 역대총재중에 가장 짧은 것으로 되어있다.
짧으나마 매우 어려운 때였다. 당장 급한 것이 거의 붕괴되다 시피한 금융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많은 금융계 간부급 인사들이 정치자금 대출과 관련되어 붙잡혀갔다.
혼란기 속에 금융의 공백상태가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었으나 자유당시절의 과도한 정치편향에 대한 반발로 대세의 흐름은 새로운 금융질서의 확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자신 중앙은행의 총재로서 이번기회에 금융의 중립성을 정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시중은행의 대출한도가 정치적 압력에 의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점을 강력히 단속하기 위해 분기별 대출한도를 초과한 은행에 대해서는 한국은행의 재할인을 3개월간 금지시켰다.
또 시중은행이 자기자금으로 초과 대출할 경우에도 지불준비율울 인상함으로써 이를 규제할 방침도 아울러 세웠다.
폐론하고 금융질서의 확립을 논함에 있어 정치로부터의 중립이 그 본질임에 분명한데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비교적 정당의 배경도 없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정치자금을 대주거나 대출에 관련될 경우가 드러나면 강력하게 단속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나 문제에 부딪칠때마다 한은총재를 내놓겠다는 식의 배수진을 한두번 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모민주당 구파국회의원은 내가 민주당 신파의 추천으로 총재가 되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면서 금융의 중립화를 시도하려는 나의 의도를 좌절시키려하기도 했었다.
외부의 압력이 어떻든 간에 나를 가강 난처하게 만들었던 문제는 한은내 인사문제였다.
과거 금융기관의 부정대출에 있어 한은내 융자위원회의 위원과 한은간부급들이 당연히 책임을 져야하며 이에 따른 혁신적인 인사를 단행해야한다는 여론이 일부에서 강력히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정대출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로 따지자면 한은뿐 아니라 시중은행쪽에 적지 않았기때문에 이들을 모두 인책사퇴시킨다는 것은 금융의 공백이라는 보다 심각한 사태를 유발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여러차례 거론되었었으나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결국 새정부로 문제처리를 넘길 수 밖에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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