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힌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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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힌샘」은 주시경 선생의 아호다 글자의 뜻으로 보면『크고 흰(백)샘』을 말한다.
흰 색깔은 아마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야수의 표현인 것도 같다.
고의 생애를 보면 정말 한 흰 샘 그대로였다.
우리의 한글이 만들어 진지는5백년도 넘는다. 그러나 창제 후 반세기 남짓만에 연산은 벌써 한글을 돌보지도 않았고 그 후에도 줄곧 그랬다.
금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학부(지금의 문교부와 같은 기구)에「국문연구소」가 생기고 한글은 언어로서의 체계를 다시 찾게 .되었다. 광무11년, 1907년 .의 일이다. 바로 이일을 앞장서서 꾸민 사람이 한힌샘이었다. 그때 나이 32세.
우리말은「국문연구소」를 거치는 동안 한 허물을 벗을 수 있었다. 문법이나 글자의 짜임새가 오늘의 한글과 거의 비슷하게 정리되었다. 2년여 동안 23회의 토론을 거쳐 통일된 연구보고서가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마저 학부대신이 갈리고 나라의 운수가 쇠망하면서 흐지부지 되어 버리고 말았다.『국어문전 음학』 『국어문법』 『말의 소리』등 주시경의 저작은 이때의 연구업적이다.
주시경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 난산이 차돌개지만, 태어나기는 풍산 무능 골에서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82세의 한평생을 청빈낙도의 문필가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얼마나 가난했던지, 한 시절 산에서 도라지를 캐다가 죽을 쑤어 먹고 지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주시경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니던 인연으로 그 시대의 명사들을 알게 되었고,19D세 되던 해엔 홀연히 머리를 빡빡 깎고 배제 학당에 들어갔다. 그 무렵 (1894년)만 해도 소년들은 댕기를 늘어뜨리고 지냈는데, 당돌한 결심을 한 것이다. 서재필 박사를 만난 것도 배제 학당에서이었다. 「협성회보」 나 「독립신문」을 순 한글로 펴낸 것은 주시경의 영향이기도 했다.
주시경은 배제 학당 시절, 서양문화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영어교육을 통해 문법의 개화를 생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시경은 「주보 따리」 「주보용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문에 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대중교육을 통해 널리 펴는 일에 열의가 대단했다. 일요 강습소를 찾아다니면서, 혹은 각급 학교를 순방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국어강의를 했었다. 책 보따리가 그의 손을 떠나는 날이 없었다. 새벽 1시 반 취침, 새벽 5시기상. 이때의 일과는 이처럼 밤낮도 없었다.,
오늘 광복절을 맞아 정부는 독립유공자 다수를 포상했다. 뒤늦게나마 주시경 선생이 최고의 포상인 대통령상을 받게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의 오늘도 이런 분들의 음덕이 없었던들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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