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조정권의 『불』|대상을 통한 삶의 탐구보다 대상을 관조-박청강의 『생선』|해학을 통해 대상을 의식 속으로 확장-홍영철의『귀뚜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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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퇴각하는 문명의 지평에서 일찍이 「니체」가 본 것은 확산된 모호성이었다. 그것은 풍요한 물질 문화 속에서 사라지는 정신적 속성. 물질과 정신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증발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존재론적 갈등이 나타나게 된 이유다. 과연 시는 그 존재론적 정당성을 상실하고만 것일까. 이달의 시단에서 읽게 되는 몇몇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조정권의 『불』 (문학 사상 7)에서 읽게 되는 것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이다. <불>이라는 낱말이 환기하는 것은 일종의 생명성·원시성·파괴성이지만 그는 시속에서 파괴가 바로 생명과 통함을 집요하게 노래한다. 그러한 노래가 성취하는 것은 따라서 파괴와 참조의 변증법적 공간이다. 그는 싱싱한 원시주의, 일종의 야만주의를 전개한다.
그는 어떤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참담하게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노래하는가. <불>에서 그가 읽는 변증법적 운동은 이 시대의 삶이 상실하고있는 진면목이다. 따라서 그가 <불>을 통하여 새롭게 깨닫는 <징그러운 상처><회><산돼지 대가리><강철의 언어>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미적 충동이 떠올리는 의식적 언어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예술적 충동이 소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생·사회·문학 일체를 포섭하는 내면적 충동은 이 시에서처럼 삶의 내적 「아이러니」의 역동성으로 실현된다.
이시영의 『저녁에』 (문학 사상 7)가 보여주는 것 역시 잃어버린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조정권과 다르게 그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충동이다.
그의 시로서는 매우 간결한 작품에 속하는 『저녁에』에서 그는 <별>과 <벌레>의 대비적 구조를 통하여 순수한 윤리적 태도를 제시한다.
그의 윤리적 태도는 그러나 아직은 비극적이다. <별>이 어떤 단단함 진리, 결코 소멸하지 않는 희망을 표상 한다면 <벌레>는 그러한 희망이나 진리와 가혹하게 충돌해야 하리라.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이 강력하게 제시되지 않는 것은 <저녁>이라는 시간적 질서 때문이기도 하다.
박청강의 신작 5편 『흑화집』 (심상 6) 가운데 특히 『생선』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변증법적인 미적 충동도, 순수한 윤리적 충동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명상적 충동이다. 대상과의 싸움이나 대상을 통해 삶의 방법을 탐구한다기보다는 대상의 관조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가 역동적이기보다는 다소 정태적이다.
이 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보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보류가 아직은 현상학적 환원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다. 「칸트」적인 관조의 세계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시의 평면성이 노출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세련미도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우리는 발견 할 수 없는게 아닐까.
홍영철의 신작 4편 (문학과 지성 여름)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신선한 감수성이다.
특히 『귀뚜라미와 시』에서 그가 보여주는 명상적 충동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관조이면서 자기 해학과 결합되어 어떤 참담함 마저 느끼게 한다. 앞의 시인이 대상을 대상 자체로 인식하려 한다면 이 시인은 최소한 대상을 의식 속에서 확장한다.
그러나 『꽃잎』 『길』 같은 시에서 그는 짙은 자기 해학을 통하여 대상을 확장하고, 그것은 익살의 「톤」을 거느린다. 그것은 시의 존재론적 갈등을 극복하는 길, 시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상대적으로 깨닫게 한다. <시인·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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