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석방 노력 눈치채 안도의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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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긴장속에 나날이 지나갔다.
10월15일 새벽 2시께, 나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좀 잤는데도 머리는 어지럽고 피곤했다.
나는 두 무릎을 끓고 정좌를 한후 두손을 양 무릎위에 얹고 눈을 감은뒤 명상에 잠겼다.
생자는 필멸, 누구나가 다간다. 갈 때가 되면 깨끗하게 가야 한다. 나는 죽음의 검은 문앞 일보전에 서있는 것이다. 검은문이 열리면 그안으로 무아의 경지에서 걸어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 검은문 앞에서 합장을 하고 서서 그 문이 이제 열리나 저제 열리나 하며 기다리고있는 것이다.
명상을하고 있는동안 마음은 깨끗하고 편했다. 어디서인가 새벽 종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명상에서 깨어났다.
이로부터 나는 가슴을 에는 마음의 아픔이 있을때마다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를 가리지 앉고 경좌를 하고 명상에 잠겨 무아의 경지에 들어갔다.
대학생도 나를 따라 경좌를 자주 했다. 이런 속에서세월은 흘러 2개월이 지났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광대뼈」 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제2심문도 없었다.
12월4일 뜻밖에드 「사이공」시내에 있는 이순흥교민회장으로부더 약5초의 차입품이들어왔다. 회장은 치약·칫솔·파자류·「비타민」·마른 새우·설탕· 「짜봉」·말린 「바나나」·땅콩· 육포· 담배· 성냥등등이었다.
골방에 격리 수용된 이른바 중범자에 대한 차입은 일반적으로 안되는 것이 이곳의 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차입이 허용된 것은 아마도 국제적십자사나, 「프랑스」정부나,기타 제3국의 도움에 의해 이뤄진게 아닌가 추측되었다.
우리 한국경부는 수간되어있는 외교관들을 구출하기위해 효과적인 외교활동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졌으나 이를 확인할 길은없었다. 나는 방안에서 차입품을 경리하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북한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현저하게 감소되었다고 판단되었다. 죽음의 일보전에 서있다는 절박감속에서 해방되어 진장이 풀렸다. 이런 속애서 1975년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12월30일. 밖에있는 이순흥교민회장으로부터 약5kg의 식품및 일용품과 모포한장이 또차입되었다.
대학생은 특별차입를 받지못하고있어 내가받은 차입품을 둘이서 나누어 쓰기도하고 먹기두했다.
새해가 밝아 1976년이되었고 2월11일 에는 월남 「와하우」 교 군총사령관인 「짠·우· 바빈 가 「례반주예」 형무소로부터 우리방으로 이감되어왔다.
1926년생인 그는 학력이라고는 국민학교 1학년 중퇴인데「렁컨」대통령 모양으로 독학을 하여 글을 익히고 「와하우」 교 군총사령관을지낸 입지전속의 인물이었다.
항불투쟁, 반 「자딘·디애」투쟁으로 이름을 떨쳤고「티우」정권 초기에는 이를 지지하다가 「티우」 가 「바이」 와사이가 좋지않은 미국유학을 다녀온 젊은 「인텔리」 「와하우」교도 정치인인「상」이라는 월남장원의원을 가까이하자 「바이」는 개인감정으로 「티우」 에 반기를들그 일어섰다.
그는 자기부하 수십명을 선발하여 도끼로 손가락 한개씩을 자르게하여 「티우」를 비난하는 항의시위를했다. 집권층 인사를 비난하는 이유를 붙이기란 간단했다.
그는「티우」가 비민주적이고 편파적이고 부폐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미국의 일간지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신문들은 이 손가락 걸단시위를, 크게 보도했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티우」 의 명성은 떨어졌다. 「바디」는 항불투쟁을 할 때와 반「고·딘·디엠」투쟁을 할때 지하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하이탑」이었다. 그래서 월남인들은 그를 통칭 「하이탑」 장군이라 불렀다.
이「하이탑」장군은 옛날에 범증이나 제갈공명같은 사람들이 점꽤로 점을 쳐서 미래를 알아 보듯이「여우바이사우」라는 14개의 풀줄기로 된 점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약2시간「여우바이사우」 로 점을 쳤다. 나는 옆에서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했다.
방안에 식구가 한명 더 늘었으니 이야깃거리도 더 많아지고 그전에 비해 시간이빨리가긴 했으나 형무소밖의세월에 비하면 형무소안의 세윌은 여전히 지루하기만했다.
월남인들 말에 의하면 호지명은 자서전에서 『형무소의 하루는 밖에서의 쳔년에 맞먹는다』 고 기술했다한다.
나는 호지명이 말하듯 그렇게까지 터무니없이 생각하지는 않으나 사실대로 말해서 형무소의 하루는 때에 따라서는 밖에서의 백일같이 느껴질때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형무소의 하루는 밖에서의 10일이 맞먹는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2월28일. 이순흥 교민회장으로부터 세번째의 특별차입이 약6kg 들어왔다. 차입품목은 그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대학생과 「하이탑」장군은 특별차입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내것을 가지고 3명이 함께 먹고 쓰는것이었다. 차입품을 절약하기 위해 땅콩알까지도 몇알씩 세어가지고 아껴 먹었으나 그래도 받은날로부더 약 한달쯤되면 차입식뭄은 완전히 바닥이 나고마는 것이다.
3월24일 하오3시께 대학생이 구대장 간수에게 불려갔다. 얼마후 돌아와 그는 내일 (3월25일) 이 A동에서 여러명이 재분류되어 이 형무소내의 다른 시설좋은 감방으로 이감되며 자기도 그속에 끼어 이감되어 간다는 말을 했다.
저녁식사후 나는 대학생과「하이탑」장군과 5시간이상 이야기하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대학상에게 「비타민」 약간, 치약· 비누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대학생은 우리방을 떠나 간수호송하에 어디론지 가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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