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백제인"|청빈으로 유물 보존 힘쓴 자상한 손길이 곳곳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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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승과 저승길로 갈라선 홍연제 선생을 부여 빈소에서 이렇게 졸지에 대하게 될 줄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다. 망팔십의 노령에 걸맞지 않는 그 동안에는 늘 밝은 미소가 깃들였었고 그 강단 있는 꼬장꼬장한 체력으로 보아 연제 선생은 아마 백수를 누릴 것이라고 모두들 믿고 있었다.
연재 선생이 부여 박물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왜정 치하로부터였고 해방 직후 이것이 신생 국립박물관 부여 분관으로 개편 발족되면서 부여 박물관장에 취임해서 1966년에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그 평생을 부여 박물관을 위해서 이바지해 왔었다.
경주 박물관장의 결원이 생겨서 잠시 경주 관장을 맡은 일밖에는 부여와 평생을 같이하면서 그 청빈과 싸우면서 백제 문화를 건사하기에 오로지 열을 올려 온 드문 분이었다.
정년 한 뒤에도 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그 고장 문화재 보호 사업에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부여하면 연재 선생의 얼굴이 떠오를 만큼 백제 문화재 사랑에 있어서는 부여의 얼굴 구실을 해 왔었다.
이 제 연재 선생 작고 후의 부여가 갑자기 쓸쓸해진 느낌을 받을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광복 후 신생 국립 박물관의 창업기에 김재원 초대 국립 박물관장을 도와서 각지방 박물관의 책임을 맡아 이바지한 사람이 여러분이지만 거의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고인이 되었으므로 국립 박물관의 역사35년 만에 이제 한바퀴 세대가 교체됐다는 느낌이 깊다.
연재 선생은 1905년 생이니까 향년이 76세였고 그동안의 업적이 많았지만 6·25 전란 중에 부여 박물관과 그 소장 유물의 보전을 위한 노력이 우선 손꼽혀야만 되겠다. 그리고 백제 문화재 연구에 관한 논고가 적지 않으며 미술사 학회에서 간행된「연재 고고 논집」(고고 미술 자료집·12)은 그 결실의 하나였다. 연재 선생의 백제 미술관은 항상 백제 미술이 신라 미술에 우월한다는 주장을 일관해서 때로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때로는 경색하고 펴는 정론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설복하고자 하는 자세여서 늘 재미나는 토론장이 되고는 했었다.
말하자면 연재 선생은 백제 문화를 위해서 평생을 살았고 진짜 백제인 다운 풍모를 마지막날까지 간직한 분이었다.
연재 선생이 평소 가족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선산보다는 의당 부여읍 근린에 묻히기를 바랐음도 바로 그러한 백제 인으로서 부여의 흙이 되고자 하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 중앙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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