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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조 달러 쥐락펴락 … 세계 움직이는 그림자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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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5월. 냉전의 기운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일단의 거물들이 네덜란드 아른험 인근에 있는 빌더버그호텔에 모였다. 미국과 영국 등 11개국에서 온 50여 명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고 당시엔 국무차관이었던 월더 스미스와 부호인 데이비드 록펠러 등이었다.

 호스트는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였다. 그는 “‘서구 문명이 직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놓고 토론하자”며 그 시절 글로벌 파워 엘리트들을 빌더버그호텔로 불러 모았다. ‘빌더버그 그룹(Bilderberg Group)’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들은 이후 해마다 유럽의 최고급 호텔에 모여 글로벌 이슈를 토론했다. 올해는 5월 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1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2박3일간 토론회가 열렸다.

 영국 가디언지는 “빌더버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모임”이라며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조지 오즈번 영국 재무장관, 에릭 슈밋 구글 회장 등이 정례 참가자들”이라고 최근 전했다. 빌더버그는 돈·권력·비밀 등 음모론의 3대 요소를 모두 갖췄다. 더욱이 멤버들이 직간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240조 달러(약 24경7200조원)에 이른다는 보도도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가장 은밀한 빌더버그가 올해로 60년을 맞았다”며 “그 정체를 두고 논란이 다시 끓어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단순한 사교 클럽인가? 아니면 세상 음모의 기획자들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25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빌더버그 전문 탐사기자인 다니엘 에스툴린(48)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빌더버그 클럽(The True Story of the Bilderberg Group)』 등을 썼다.

 -빌더버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니엘 에스툴린=196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14세 때인 80년 옛 소련 정보기관인 KGB의 고문 끝에 추방당한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빌더버그 그룹 전문탐사기자다. 저서 5권 가운데 『빌더버그 클럽』은 국내에 번역 소개돼 있다.

 “모임을 처음에 주도한 인물들을 보면 빌더버그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상당수가 나치와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나치를 지지했다. 그들은 냉전이 시작되자 빌더버그에 참여하면서 반(反)소련 진영의 핵심 요원이 됐다.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파워 엘리트 120~150명이 모여 그들이 ‘메가 트렌드’라고 부르는 글로벌 정치·경제·사회이슈를 토론하고 컨센서스를 추구하는 모임이다.”

 -빌더버그 쪽은 몇 년 전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참가자 명단도 공개했다. 음모적 이미지를 씻어 내려고 한다.

 “그들은 음모 그 자체다. 그들은 구체적인 조직도 아니다. 세계 정치·경제·군사·정보 분야의 실세들이 세계관과 시각을 교류하는 네트워크다.”

 -비공개라고 해서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등도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맞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나 세계 중앙은행 연찬회(미국 잭슨홀미팅) 등도 회의 자체는 비공개다. 하지만 빌더버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참가자들의 의견차이를 넘어 합의를 추구한다. 합의 내용을 토대로 세상을 바꿔나가려고 한다. 다보스포럼 등에선 합의가 중요하진 않다.”

 사실 빌더버그만이 비밀스러운 파워 엘리트 모임은 아니다. 영국 다이아몬드 부호인 세실 로즈가 1909년에 자금을 지원해 구성한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과 미국 부호 록펠러 등이 앞장서 구성한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등이 있다.

 -빌더버그는 라운드 테이블이나 삼극위원회 등과 어떻게 다른가.

 “라운드 테이블은 애초 영어를 쓰는 엘리트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 일본 실력자들까지 받아들였다. 삼극위원회도 처음엔 미국·유럽·일본 출신 인사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등 많은 아시아 국가 엘리트들이 참가한다. 하지만 빌더버그는 여전히 미국·유럽 파워 엘리트들의 배타적인 모임이다. 운영위원회가 매년 콘퍼런스 참가자를 정해 초청한다. 라운드 테이블보다 심한 비밀주의를 고수한다.”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다. 빌더버그 그룹엔 정식 회원이 있는지, 회원이 있다면 자격은 무엇인지 등이 베일에 싸여 있다. 가디언은 “올해 회담이 열린 기간 동안 덴마크 코펜하겐 메리어트호텔에는 3m짜리 이중 철조망이 쳐졌다”고 보도했다. 참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참석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호텔 바에 진입한 기자 두 명은 체포되기도 했다고 가디언은 덧붙였다. 이런 극도의 비밀주의를 강변하기 위해서일까. 올해 토론 주제 가운데 하나가 ‘개인 사생활은 진정 존재하나?’였다.

 -올해 참가자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경제교사인 류허(劉鶴)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 등이 있더라.

 “중국계 인사들이 최근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류가 아니다. 그들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까지 빌더버그 멤버들은 중국이 세계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빌더버그는 합의 또는 의견 일치를 추구한다고 들었다. 회동 결과가 각국 정책이나 기업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

 “빌더버그 모임 직후엔 약속이나 한 듯 서방 주류 언론들이 그들이 논의한 이슈를 의제로 선정해 왔다. 예컨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91년 빌더버그 회동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빌더버그가 내세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몇몇 사람이 먼저 세상의 흐름을 낚아채고 자신들의 정책을 제안하는 것을 나쁘다고 해야만 할까.

 “빌더버그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든 실제 목적은 ‘하나의 세계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인물들이 돈과 지식,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세계 정부를 주도하려고 한다. 그들이 늘 옳은 건 아니다.”

 10년 넘게 빌더버그를 추적한 에스툴린은 “빌더버그야말로 21세기 거의 유일한 비밀의 섬”이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열린 인터넷 시대에 가장 은밀한 모임이 해마다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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