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이념은 자유·민주·민족주의|20돌 맞아 그 성격을 생각해본다-김영모 <중앙대 교수·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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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는 20년전 학생들의 민권·민주 투쟁을 4월 혁명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혁명의 고전적·서구적 개념에서 본다면 4·19는 전형적인 혁명으로 보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전통적·동양적 개념에서 본다면 ①천자가 바뀐 역성 혁명이었고 ②비합법적 방법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③부분적이나마 구질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4월 혁명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명하려면 그 전후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 구조의 이해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에서는 4월 혁명의 주도 세력의 신분적 성격과 구호 및 선언문을 중심으로 지적하여 볼까한다.
4월 혁명은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그 발생 원인으로 ①3·15 부정 선거 ②경찰의 포악과 폭력 ③특수층의 부정 부패에 대란 항거를 지적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의 백색 전제주의를 타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투정을 전개하였으며 나아가 반 외세·반 부정 부패·반 폭력·반 특권의 민족주의적 개혁주의적 학생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4월 혁명은 초기에는 고교생이 선도하였지만 대학생이 혁명을 주도하였고 마침내 교수와 시민까지도 합세하여 전국적 수준으로 확산 발전되어 국민 혁명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사회적 성격에서 4월 혁명의 정신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학생들은 해방 이후, 서구식 민주주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한글세대이기 때문에 일제하의 신민 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의 정치적 이념과 사회적 가치와는 판이하다. 학생들이 지닌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은 우리 나라가 비록 그것이 형성된 서구의 역사적·사회적 배경과는 상이할지라도 이것이 참된 근대적 가치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또 당시의 학생들은 일제하 민족 독립 운동의 주역이 학생들이었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선민의식이 매우 강렬했다. 그리하여 4월 학생 혁명은 자유민주주의운동 뿐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구호와 선언문을 보면 공통된 이념이 자유와 정의 및 민주주의다. 즉 공민권적 자유주의와 정치권적 민주주의, 그리고 부정·부패·특권을 배격하자는 평등주의를 찾으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민주 공화정의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면서도 실제로는 전제주의 정치를 행하였다.
그같은 부정·부의·부패·폭력·특권·특혜가 난무하던 시대에 감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민족적·사회적 양심을 지닌 학생들의 젊은 혈기였다.
젊은 혈기는 이러한 국민적 과제뿐만 아니라 이것이 1차적으로 해결된 뒤에는 남북 회담·남북 교류·중립화 통일·한일 회담 반대·한미 행정 협정 반대의 민족 주체성과 민족 통일의 문제까지 거론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재건에 의하여 민족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구호였던 「기성세대는 물러가라」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강했다. 이것은 해방이후 분단 국가와 전제 국가의 건설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4월 혁명의 정신이 자유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시민적 민족주의는 학생들의 신분적 계층적 성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의 하나는 대학 (University)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대학의 기본 정신이 보편주의 (Universalism)이고 이것은 자유·평등·민주주의라는 시민 정신을 의미하며 여기에서 학생들은 시민 정신을 배웠던 것이다. 다른 것은 구 중산층 출신이 약 6할이나 되며 신 중산층 출신은 약 3할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약 5할이 중류층이고 약 25%가 겨우 살아간다는 귀속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고교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학생들은 시민적 배경을 지닌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 사회적 이념은 자유·평등·박애의 시민 정신과 민족 정신이 매우 충만하였다. 따라서 4월 혁명의 기본적 이념은 자유주의·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이다.
이러한 4월 혁명 정신을 계승하겠다던 새로운 집권 세력 (민주당)이 과감하게 혁명 정신을 구현하지 못하고 파쟁을 일삼다가 급기야 5·16 군사 혁명에 의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5·16 혁명 정신은 4·19혁명 정신을 발전시키겠다고 하였으나 그 의의와 평가는 오히려 퇴색한 느낌을 주었다.
오늘날의 상황이 20년 전에 비하여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의 학생들이 주장하였던 구호의 일부가 민주화 개헌 논의와 학원 자율화에서 그대로 나타나고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과감한 4월 혁명 정신이 선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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