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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숲속의 추억' 감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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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벽까지 여관 뒤지고 다닌 놈한테 꼭 산을 타라고 해야겠어? 날씨는 뭐 이리 벌써 덥나?” 점퍼를 손에 쥔 송강호가 야산을 오르며 연신 투덜거린다. 매실밭 한쪽에 놓여 있는 부패된 시신을 보자마자 손으로 파리 떼를 휙휙 쫓으며 “노인네, 술 마시다 죽었네. 딱 보면 모르나? 나 형사 30년이야. 신창원이도 나한테 거의 잡힐 뻔했어”라고 능청을 떤다. 영화는 6월 12일, 그날 아침에서 시작한다.

 거물급 수배자 검거작전에 온 직원이 동원돼 어수선한 지방 경찰서에 노인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전화가 걸려오자 다들 딴청을 부린다. 당직 반장의 지목으로 현장에 가게 된 형사 송강호, 십중팔구 단순 변사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래야만 한다. 만에 하나 타살 흔적이 발견되면 수사본부가 차려지고 그날부터 야근이다. 과장에게 깨져 가며 보고서 써야 하고, 검찰청 들락거리며 젊은 검사한테 굽실거려야 한다. 얼마 전에는 영장신청서가 면전에서 찢기는 수모도 당했다.

 백발의 노인, 가지런히 놓인 신발, 그 옆의 빈 술병들…. 지역 병원 검안의도 타살로 볼 만한 단서가 없다고 한다. 뼈가 보일 정도로 부패한 시신, 아침까지 쫓아다닌 ‘그’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다. 이제 남은 일은 신원 확인해 가족에게 알리는 일뿐이다.

 거물 검거작전 속에서도 나름의 평온을 찾은 경찰서가 발칵 뒤집힌 건 40일 뒤.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통보받은 순간부터다. 새벽에 방송사 중계차까지 몰려온다. 기자와 경찰이 뒤섞인 현장에 뒤늦게 폴리스라인이 설치되고, 정밀수색이 벌어진다. 이때 관객들은 블록버스터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백미인 논두렁 신을 떠올린다. 신입 순경이 자랑스럽게 찾아 놓은 용의자 족적을 무심히 지나가는 경운기 바퀴가 깔아뭉개는.

 경찰서장은 “신발도 ‘와시바’라는 고가의 명품으로 확인됐습니다”고 말한다. 세탁 가능하다는 뜻의 독일어 ‘waschbar’(바슈바)가 브랜드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객석에선 웃음이 터진다. 영화는 “검찰·경찰을 못 믿겠다”고 외치는 시위대 앞에 풍채 좋은 의원이 나타나 “나라의 근간인 ‘형사사법체계’를 흔들지 말라”고 꾸짖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냉소다.

 영화는 이제 블랙코미디에서 죽음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추리극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제목은? ‘숲속의 추억’이다. 그 거물이 마지막에 머물렀던, 사건 현장에서 2.5㎞ 떨어져 있는 송치재 별장의 실제 이름이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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