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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vs 현대차, 그 상상력의 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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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무한도전’ 멤버가 아니라도 운전자는 카레이서들이 달리는 전문 트랙을 달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일반인에겐 언감생심이지만. 한데 독일차 업체 BMW가 전문가용 트랙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드라이빙센터를 영종도에 연단다. 가봤더니 물이 흥건한 미끄러운 도로에서 갑자기 뒷바퀴를 밀어내고 앞에선 물기둥이 치솟는 운전 코스, 통나무길과 모래웅덩이를 지나는 오프로드 코스도 있고, 레스토랑과 어린이 학습장, 축구장·농구장도 있다. 가족과 놀러 와 눌러둔 폭주본능도 깨울 수 있는 새로운 테마파크다.

 BMW도 차 성능 테스트 등을 위한 드라이빙센터를 일반에 공개하는 건 세계 최초란다. 이 회사 장성택 이사는 “한국인들은 군만두를 사도 일단 시식부터 한다고 했더니 본사에서 일반인 개방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100년 된 독일 기업의 상상력과 소비자를 읽는 집중력’은 이 정도였다.

 최근 세계 기업들이 차별화 전략으로 도입하는 게 ‘체험’이다. 상품의 품질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이젠 상품보다 소비 과정에 끼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1차(채취), 2차(제조), 3차(서비스) 산업 이후 포스트 3차산업은 체험이 될 거라는 말도 나온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각종 독창적 체험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스포츠업체 나이키는 2000년대 중반 애플과 손잡고 신발창 센서로 운동량을 측정해 아이팟에 저장하는 ‘나이키 플러스’를 시작했는데, 이젠 이를 계속 진화시켜 자신의 운동기록을 정보화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경쟁까지 하도록 하는 ‘희한한 문화’를 만들었다. 컴퓨터 게임에 밀려 한때 존폐위기에 몰렸던 장난감업체 레고도 디지털 디자이너 프로그램 등 소비자의 체험을 기업 안으로 끌어들이며 어른까지 소비자층을 확대하는 체험 전략으로 다시 일어났다. 외국 글로벌 기업들은 여전히 기업가 정신의 원천인 창의력·상상력·모험심으로 아무도 해보지 않았던 체험에 투자하며 체험산업시대를 앞서나간다.

 현대차도 올봄 강남에 소비자 체험공간으로 갤러리와 카페 등으로 꾸민 모터스튜디오를 열었다. 거꾸로 매달린 자동차와 부속품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한데 한 번 본 걸로 족했다. 체험산업시대의 관건은 모든 체험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활과 습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를 통해 소비자가 행복감을 느껴 스스로 참여하도록 하는 데 있다. 현대차의 상상력은 예까지 미치지 못한 걸로 보였다.

 현대차 관계자는 체험전략 계획에 대해 “강남 한전 부지를 사면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체험공간과 자동차 관련 콤플렉스를 구성하고…” 등으로 설명했다. 정말 글로벌 경쟁력의 관건을 한전 부지 매입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부지 입찰 경쟁 전략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앞세우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세계 산업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체험산업시대를 제대로 읽고 있다는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요즘 최경환 경제팀이 기업들의 사내 유보금 과세안을 내놓자 기업들은 ‘투자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며 발끈했다. 한데 기업들이 사내 유보를 쌓아놓는 관행이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논란은 한두 해 된 얘기가 아니다. 기업 돈이 투자되어 돌지 않고 고이면 국가경제도 돌지 않는다. 이를 지적하면 ‘투자 의지를 꺾는다’며 반발하고, ‘국내엔 투자할 곳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기업들의 오래되고 식상한 레퍼토리다. 어제 열린 최 부총리와 경제5단체장 간담회를 보니 이 논의가 투자보다는 주주들 부자 만들어주게 배당을 늘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건 아닌지 슬쩍 걱정되기도 했다.

 외국 업체는 한국에 새 투자를 하며 없던 시장을 만드는데 우리 기업은 국내 투자는 자제하고 자산 늘리는 데 열심이다. 핑계는 많다. 과도한 규제, 반기업 정서, 노사갈등…. 한데 관전자로서 솔직한 느낌은 이렇다. 투자할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시대 정신을 읽는 능력과 창의력·상상력·모험심이 부족한 게 아닌지….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