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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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는 모든 사물에다 생명을 부여한 시인의 창작품이다. 모든 사물이라 할 때 거기에는 시인의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성일 수도 있고, 시의 미학적 가치에 의미를 둔 사물의 인식일 수도 있다.
우리들은 흔히 전자의 경우를 사회성향이 강한 시로 보고, 후자의 경우를 개인성에 치중한 순수의 시로 본다. 이러한 도식적 구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논의들이 많이 있어왔고, 또 계속되고 있으나 시의 현실성이란 문제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이달에는 어느 달보다도 현실적인 삶에 민감한 시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추세인지는 모르나 사회성향에 치중한 시와 미학적 가치에 기반을 둔 시들이 한결같이 현실의 의미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모든 사물의 인식은 현실을 근거로 하고 있어야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시들은 어디까지나 예술미를 바탕으로 한 현실인식이다.
정현종의『늙고 병든 이 세상에』(문예중앙 봄호)는 우리사회의 병리를 유년 시절의 순수와 대비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낸 시로 보인다.
『자꾸 자꾸 물을 줘야 해요/나무도 사람도 죽지 않게/죽음이 공기처럼 떠도는 시절에/그게 우리가 숨쉬는 이유/그게 우리가 꿈꾸는 이유.』(『늙고 병든 이 세상에』전반부)
죽음이 공기처럼 우울하고 답답한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간에 새로운 삶의 꽃이 필 것을 희구한다. 이 시인은 그러한 바람의 이상으로 유년시절의 경이와 동경이 되찾아질 것을 간구한다.
예술의 세계에서 현실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정현종씨는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미학적인 가치여야 함도 아울러 의식한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예술관에서 온 것이라 믿어진다.
정대구의『돌밭』(창작과 비평 봄호)은 비근한 사물에다 현실 의미를 둔 시로 보인다.
북한강 돌밭에서 지천으로 구르는 돌무더기. 그리고 이리저리 발길에 채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못생긴 돌은 언제나 하찮은 존재일 수는 없다.
정대구씨는 이런 무용지물이며 천덕꾸러기인 돌에다 미적 가치와 생명의식을 부여하고 있다. 나를 잃어버린 천한 생활에서 우선 나의 본질적인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 짓밟힌 생활에서 진짜의 숨쉬는 보람을 찾는 것이 돌의 뜻이다.
정대구씨는 시를 결코 「메시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비근한 사물에다 생명과 의미를 주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단편으로 생각한다.
『나도 숨쉬는 보람으로/뜻 둔 사람에게 들키기를/들켜서 한몫의 삶으로 눈을 뜨고/내가 나의 뜻을 살리리라/진짜진짜 한 점의 살/한 점의 돌이 될 때까지』(『돌밭』의 전반부)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생의 참 가치를 아는 존재로서의 숨쉬는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그의 시에 대한 태도는 앞의 정현종씨와 별반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송수권의『등잔』(문학사상 4월호)은 양반귀족들의 백자와 서민들의 애환이 곁들인 등잔을 대비하여 예술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작품이다.
이 시인의 말처럼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를 정도의 강한 역사의식으로 쓴 시로 생각되나, 이 시에 흐르고 있는 섬세한 서정은 역시 시는 역사의식보다는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한 미적 감각에 있음을 보여준다.
김용언의『농민』(한국문학 4월호)은 소박한 농민의 삶과 우리시대의 문제성을 살려 위의 여러 시들과 함께 매우 주목할만한 작품으로 생각된다.<평론가·관동대교수>【장윤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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