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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개헌비사 발췌개헌파동(9) 원내분포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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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각책임제 개현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이 박사 지지 세력이 들고일어났다. 원외 자유당을 비롯하여 대한국민당·여자국민당·국민회·대한청년단·노총·농민총연맹·종교단체등 20개 단체대표가 개헌안이 재출된 날 태백「그릴」에 모여「내각책임제 개헌안반대 전국정당·사회단체 공동 투쟁위」를 구성하고 서명공작에 들어갔다.
이들은 며칠 뒤 내각 책임제는 전쟁완수·남북통일·부흥건설의 3대 당면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길이 아니며 빈번한 정변만 되풀이하는 「프랑스」제4공화제의 전철을 밟게된다는 요지의 반대 선언문을 채택했다.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탄압을 받고 부산바닥이「민의 발동」으로 수라장이 되어도 야당의원들이 이에 굴복하지 않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 박사는 즉각 대처방안을 실천에 옮겼다.
2대 국회가 개원되고부터 51년5월까지 약1년간 국회부의장을 지낸 장택상씨를 개헌안이 제출된 사흘후에 국무총리로 지명한 것이다.
국회바깥의 문제는 민족청년단을 거느리는 이범석내무장관이 맡아서 처리하고 원내에서는 장의원을 국무총리로 기용해 사태를 진압하려는 속셈으로 풀이되었다.
원내지도자로서 신익희씨가 있었지만 그는 국회의장인데다가 이박사 반대에 앞강선 민 당대표였고 조봉암부의장도 정부노선에 정면으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장택상씨는 지모가있고 수도경찰청장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낸 경력이 있어 이박사에게 충성을 다 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 같다.
장총리는 국회에 있으면서 무소속이었지만 신나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21명의 신나회 「멤버」 가운덴 장총리와 같은 경북출신이 제일 많았다. 장총리를 비롯해 김판석(포항)·이호근(예천)·서이환(울릉)·여영복(김능)·권중돈(영천갑)·한국원(영덕)·권병노(의성을)·백남식(상주을) 의원등 9명이었다.
전남의 김종순(나주갑)·박기배(해남을)·장홍염(무안을)·임기봉(목포), 전북의 김상현(무주)·지련해(옥청) 의원도 회원이었다.
그밖에 이진형(정선)·김종렬(대전갑)·오성환(마포갑) 의원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김판석·이호근·장택상·지련해·김상신 의원등은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투위의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신나회 「멤버」 중 내각책임제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나중엔 알쏭달쏭하게 바뀌어 갔다.
말할것도 없이 신나회가 장총리의 원내포섭공작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원내자유당의 개헌주도파나 민국당은 포섭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민우회도 몇 사람 태도를 바꾸었다.
김준희의원(진안)은 내각책임제에 대한 이의파 서명에 참여했다.
무소속가운데도 우리 동지였던 김광준의원(울진)등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하는 서명자가 점검 늘어났다. 원내자유당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음식점 삼우장에 드나들며 태도변화를 드러내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박사 지지세력인 원외자유당과 동조하는 이른바 자유당 합동파가 불어났다. 「삼우장파」 라고도 불려졌다. 원내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냐, 내각책임제냐를 놓고 친여세력의 포섭공작에 의해 합동파와 잔류파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불과 4, 5개월전 원내·원외의 2개 자유당이 분열 발촉 됐을때 현역의원은 양우정씨(함안)한사람 뿐이었고 그 한달후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표결때 지지의원이 19명밖에 되지않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원내자유당은 51년5월19일 대통령직선제 지지의 합동파와 내각책임제 주장을 고수하는 잔류파로 갈라서게 됐다.
합동파는 원내의석의 3분의1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기명이란 이 숫자는 권력에 의한 분열공작이 아니었더라면 나올 수 없었던 큰 세력증가였다.
황성수(용산갑) 여달홍(양평) 임영신(금산) 조경규(대구갑) 이갑성(대구병) 배은포(달성) 전진한(부산무) 김정실(개성)의원 등도 합동파로 등록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을때 서명한 1백23명의 세력분포는 이제 큰 변화를 겪게된 것이다. 장택상총리와 신나회, 그리고 원외자유당 연합작전의 소산이라고나 표현할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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