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개헌비사 발췌개헌파동|두개의 자유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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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가 제안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이 부결되자 대로한 이승만대통령이 국민궐기를 종용하는 담화를 연속적으로 발표하여 전국에서 민의 소동이 벌어지게 되자 이 사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모든 사람이 갖게됐다. 나는 이 박사와 만나서 정치적 타결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고 판단하여 2, 3차례 대화를 가졌다.
처음엔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와 내무위원장인 서민호의원이 이 박사를 찾아갔다.
신익희의장과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나중엔 신의장·각정당대표·서내무위원장등과 함께 이박사를 만났다. 그때마다 이대통령은 완강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다. 『중인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원하는데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에게 권리를 되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왜 계속 국민의사를 배반하고 있는가』 고 엄중하게 공박했다.
더 나아가 그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대통령직선제를 반대하는 의원들을 소환해야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요샛말로 저항권을 발동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얘기와 같은 것인데 불행하게도 그의 말은 정부주도의 저항권인 셈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정부쪽과 국회의 생각이 판이하고 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게되자 국회쪽에서는 태통령에는 이 박사를 그대로 모시더라도 내각책임제를 빨리 채택해 시국의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의사가 점점 커갔다.
나는 그전부터 내각책임제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이박사에게 나의 이런 생각을 여러번 설명한 일이 있었다. 전부터 기초위원으로서 정부조직법이나 국회법등의 성안 내용을 그에게 보고, 설명했었다.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혁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나는 당시 법사위원장이고 제헌때 기초위원이었다는 점에서 초안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나를 비롯하여 개헌의 주동적 역할을 담당할 사람들은 대부분 원내 자유당소속이었다.
이 원내 자유당은 「4·19」를 맞은 자유당과는 다른것이었다.
이 박사는 본래 정당을 부인한 사람이었으나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면 재선이 어려울 것 같고 직선제를 실시하면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실감하게 됐다.
처음에 이 박사는 정당을 만든다면 평민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가장 큰 정당은 나중에 민국당으로 개편된 한민당이었는데 이 박사는 이것이 지주계급을 대변한다고 보고 이를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민당이라고 해다가 그 후엔 노농당으로 더 자주 거론됐다.
51년8월15일 광복절기념사에서 그는『일반국민이 정당의 의미를 철저히 알기 전에는 정당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해 왔으나 지금은 그 시기가 와서 전국에 큰 정당을 조직해 농민과 노동자들을 토대로 삼아 나라의 복리와 자기들의 공동복리를 위해 정당한 정당을 만들 때가 왔다』 고 창당의사를 들고 나왔다.
그때부터 연말까지 이 박사를 받드는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계속됐다.
무소속으로 원내에 들어온 나는 정당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나와 같은 입장인 의원들과 공화구락부라는 친목단체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민당이 있었지만 많은 「인텔리」는 이애 반발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오히려 낡은 지주 개급 보다 독립운동의 경신을 계승하면서 자유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서민정당을 만든다는 이 박사에게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가진 이견이 나타났다.
순수한 정당의 이념에 앞서 이박사에 대한 추종을 강조하는 청년세력이랄까, 혈기왕성한 세력이 현성됐다. 이들은 이박사를 당수로 모셔야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이와는 달리 원내의 기성 정치인은 이박사를 당외의 초연한 위치에 머무르게하고 원내인물을 당수로 해야한다는 견해였다.
같은 맥락에서 이박사 추중세력은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했고 우리는 내각 책임제의 견해를 고수했다.
이같은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채 51년12월23일 두개의 자유당이 발족됐다. 이날 상오 국회의사당에서 오위영(울산갑) 엄상섭(광양) 홍익표(가평) 정혜주(사천) 이재학(홍천) 태완선(영월) 김영선(보령) 김용우(서대문갑) 이채오(통영을) 박정량(전주) 박만원(군위) 송방용(김제갑)의원등 쟁쟁한 「맴버」와 나를 포함한 93명이 모였다. 당수인 중앙위의장은 공석으로 남겨두고 부의장에 김동성(개성) 이갑성(대구병) 의윈을, 상임위의장엔 오위영의원(울산갑)을 선출했다.
한편 이날 하오에는 부산시내 조선극장에서 또 하나의 자유당이 창당됐다. 당수에 이승만, 부당수에 이범석씨를 추대했다. 이 자유당엔 원내에서 양우정의원(함안)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원외인사였다.
의사당 안에서 창당된 것은 원내자유당, 의사당밖 조선극장에서 생긴 것은 원외자유당으로 불려졌다.
당의 정강정책도 원내자유당은 내각책임제를, 원의 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를 표방했다.
원내 자유당은 탄생때부터 탄압의 대상이 됐고 20여일후인 52년1월18일엔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키는데 앞장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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