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문명 지구촌 현장을 찾아서] 11. 유럽의 참여정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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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치는 더이상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단체나 일반 시민의 목소리가 정치에 영향을 주고 정치를 바꾸는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최근 시민단체들의 파병반대 압력에 국회가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시민단체.학생들이 주도하는 반전운동은 각나라 정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의(代議)민주주의가 위축되고 시민들의 '직접 참여정치'가 팽창하는 것이다.

시민들의 직접 민주주의는 각 국가 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전쟁 같은 국가 간 이슈는 앞으로 이 네트워크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정치에 다가가는 시민.학생'의 모습이 흔하게 눈에 띈다. 독일 뮌헨과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참여.교육의 현장을 중계한다.

#1:뮌헨시 '볼프강 괴테'고등학교의 체육관. 이 학교와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학생 2백여명이 모여 모의의회를 열고 있다. 일반 학교에서 벌어지는 '학예회' 성 모의의회와는 풍경이 다르다. 주관하는 주체도 시당국이고 80명의 시의원 중 10명이 참가했다. 이날의 주제는 동성애자나 성전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었다. 이른바 '성(性)의 정체성'이다.

'시의원'들은 모두 10대지만 거리낌없이 성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발표했고 주장을 폈다. 한 학생은 "개인의 성 정체성이 반드시 태어날 때의 육체 상태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성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곧바로 반박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다. 성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다. 단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왜곡됐을 뿐이다."

학생들의 의사 진행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논리가 도전을 받아도 누구 하나 흥분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대 의견에 대해 존중의 뜻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풀어나갔다.

토론이 열기를 띠자 구경꾼처럼 서 있던 일반 학생들의 참여도 줄을 이었다. 너도나도 발언권을 얻으려 손을 들었다.

학생들의 의견은 진지하게 접수됐다. 배석한 '진짜' 시의원들은 주제와 관련된 정책에 관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변했다. 이들은 학생들이 자라나서는 유권자가 되고 그들의 표가 자신들이 속한 정당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토론을 지켜보던 교사들은 학생들의 정치 학습이 무척 대견스러운 표정이었다. 한 교사는 "진짜 의원처럼 자신의 논리를 당당하게 개진하는 학생들이 자랑스럽다"며 "토론 수준과 진행 방식이 진짜 의회에 뒤지지 않을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뮌헨시청 교육연구소의 사회책임주제국장인 강정숙(55.재독동포)씨는 "올해 들어서만도 환경.마약.학교폭력.외국문화 수용 등 생활 속의 사회.정치적 이슈를 놓고 여러 차례 모의의회가 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식있는 유권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 교육을 통해 천천히 길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2:프랑스 고등연구원 바로 뒤 뤼 드 셰르셰 미디에 있는 수전 조지의 아파트는 고성의 미로를 방불케 했다.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간신히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냈다.

조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가장 앞장 서서 반대의 깃발을 올리고 있는 세계시민운동 ATTAC(Association pour la Taxation des Transaction financieres pour l'aide aux Citoyens)와 TNI(TransNational Institute)의 창시자다. 그녀는 다국적 또는 초국가 기업의 세계 지배 음모를 폭로한 '루가노 리포트'를 저술하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는 ATTAC 멤버인 프랑스 국회의원들을 만났고, 오후에는 소방서 민영화에 반대하는 캐나다의 소방대원들과 만났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연이 있고요."

조지는 미국에서 학부를 나오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운동에 합류했다. 반전운동의 평화주의 정신을 한층 더 깊게 하고 세계적인 유대를 만들기 위해 1974년 TNI를 창설했다.

인터뷰 도중 조지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29개국에 대해 서비스 시장의 전면 개방을 요구하는 유럽연합(EU) 내부문건을 보여주었다.

"유럽 의회에 있는 친구가 보내준 것이지요. 한국 정부가 여기에 대해 어떤 답을 보냈는지 한국 국민들은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개방 항목에는 교통.통신.법률.의료.교육.우편 등 국가의 모든 업무가 다 들어있어요. 이런 중대한 사항에 대해 일반 국민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ATTAC는 1백30여명의 프랑스 국회의원과 유럽의회 의원들, 교수.언론인.교사 등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운동이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기업의 투기 자본에 세금 (일명 토빈세)을 매겨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 단체는 시애틀에서 밀레니엄 라운드 반대 시위를 벌였고, 2001년 카타르 도하,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서비스 시장의 전면적 개방을 요구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요구에 맞서 세계 시민사회운동을 주도해 왔다. 수전 조지가 ATTAC의 회장이다.

ATTAC 프랑스 본부 사무실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근처 뤼 드 피뇰가의 작은 주택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몇 명의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전화를 받고 컴퓨터를 치고 있었다.

"ATTAC에는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주필), 베르나르 카생(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 대표), 포르투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마라구 등과 같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편집위원인 필립 골럽 파리 8대학 교수는 ATTAC가 인류사에 '지구촌 시민'의 개념을 전파하고 있으며 그런 작업은 오랜 역사를 지닌 지식인 운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뮌헨=차명제(성공회대 NGO대학원)교수.백성호 기자

파리=이정옥(대구 가톨릭대)교수.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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