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생애를 한국미 탐구에…|금관문화훈장받는 고유섭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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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0의 짧은 생애를 오직 한국미탐구에 바친 고 우현 고유섭씨(1905∼1944)가 사후 35년만에 문화훈장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그의 『조선탑파의 연구』는 불교미학에 대한 체계적연구를 집대성한 역저로 「우리 불교미술사에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몇 안되는 미술사전문학자들이 대개 그가 일하고 있던 개성박물관에서 「안목」을 가다듬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 학계의 초창기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최순우 국립박물관장을 비롯, 동국대 박물관장 황수영 박사와 이화여대 박물관장 진홍섭 교수가 모두 우현의 훈도를 받았고 각기 회화사·불교서술·도자에 일가를 이루었다.
우현은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 및 미술사를 전공한 후 동 대학의 연구실조교를 거쳐 l933년에 곧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제치하 어두운 시절에 그는 고려의 고도 개성에서 빛을 찾았고 이를 체계화한 것이다.
틈틈이 이화여전·연희전문에 강의하러 다녔으며 일간신문이나 월간잡지 기고를 통해 한국미술사의 선구적 업적을 하나하나 쌓았다. 이렇게 하여 나온 책들이 『조선의 청자』 『송도고적』『조선미술문화사논총』『한국미술사 및 미학논고』, 그리고 수필집 『전별의 병』 등이다.
그는 특히 고려청자의 신비한 비색을 아꼈으며 「베일」에 싸인 청자의 기법을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고려청자는 5월 신록 우후청천의 미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귀족적 흥미와 불교적 비애, 여성적 「센티멘털」한 것을 갖고 있으며, 또 일종의 화려성을 띠고 있다. 만지면 꺼질 듯한 나약성도 갖고 있다.』
그는 방방곡곡 유적을 안 찾아 다닌 데가 없다. 백두·금강의 정점에 오르기도 하고 경주 토함산서 동해풍광을 읊기도 했다. 명산대천에서 찾아낸 한국적 아름다움은 그의 세련된 필치속에서 그대로 살아난다.
그의 미학적 방법론이 「빈」학파나 일본인 「오오니시·가쓰노리」의 학설을 원용했다고는 하는 일부 평가도 있으나 그는 잃어버린 나라의 슬픔을 남아있는 민족의 유산속에서 찾으려 한 선구적 미술사학자였다.
우현의 유족으로는 미망인 이점옥씨(71)와 2남 5녀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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