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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생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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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 「산아제한」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마거리트·생거」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의 여류사회운동가·출산조절의 제창자.
역사가「H·G·웰즈」는 그를 두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이라는 찬사를 보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지혜이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기술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덕이다」
인도의 성인「간디」는 「생거」여사를 만나 이런 덕담을 들려 주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든 오늘의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들이 얼마나 값있는 것인가를 모두들 알게 되었다. 비록 그의 이름은 생소해도 그의 신념은 이제 인류의 마음속에 깊게 옮겨졌다.
산아제한은 그 방법에 있어선 아직도 많은 회의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산아제한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간호원시설의 비참한 경험에서 얻은 결단 때문이었다. 20세기초만해도 미국의 여성들은 병상에서 수도 없이 죽어갔다. 원하지 않은 출산·낙태·영양실조속에서의 비참한 출산, 생병의 감염. 이런 것들이 빚어내는 비척을 그는 자신의 병원생활을 통해 목격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착안한 것은 건강교육·순결교육·출산의 보호 등이었다. 이런 운동을 시작했던 1910년대만해도 미국은 그를 법률위반자로 처벌할 수 있었다. 무려 여덟차례나 그가 투옥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생거」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펴기도 했다. 『여생의 반역』이라는 간항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3호에서 그만 발간금지처분을 받았다. 「음란죄」에 저촉된 것이다.
1916년 가을「생거」는「뉴욕」5번가104번지 작은 건물에 간판을 달았다. 「산아제한」이란 문구가 공공연히 가두에 게시된 것이다. 그 무렵 계속되는 박해에 대해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피임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도 「5년징역형」을 받을 수 있었던 시대에「생거」는 반항의 기치를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투옥되었다. 재판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1918년 1월 재판관은「생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산아제한의 새로운 기원이 시작된 것이다.
가난한 석수장이의 딸, 11남매속의 3녀, 주부. 그러나 한 여생의 각성이 인류의 마음속에 남겨준 빛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 9월4일, 그의 탄생 백주년을 보내며 위대한 여생의 생애를 다시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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