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제65화 불교 근세 백년 (43)|일 불교 재산|강석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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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15해방이 되자 일제 치하 불교의 잔재를 없앤다는 명분을 세워 조선 불교 조계종의 종명에서 조계종을 떼어버리고 그냥 「조선 불교」라고 했다. 종정을 교정이라 하는 한편 종헌을 없애고 교헌이라고 했다. 또 종회 대신 중앙 교무회를 두었으며 교구제를 채택하여 각도에는 중앙총무원 산하 기관으로 교무원을 두었다.
그러나 도 교무원이 지방 행정 기관으로서 본산이 가지고 있던 옛날의 권한을 사실상 전혀 제약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지방 행정 기구는 이중이나 다름이 없었다.
1946년11월 일제 치하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제정한 이 교헌이란 것이 오히려 『사찰령에 의해 제정된 총본산법을 약간의 자구만 수정한 것』이라고 선학원을 비롯한 혁신 연맹 가입 단체들은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그 성명은 또 총무원이 재원 전환이라는 미명을 공공연하게 내놓고 영리적 주식회사 수립을 획책하고 가공적 설계로 공을 빙자하여 사리를 도모한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러기 위해 총무원이나 소위 중앙 교무회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폐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혁신 연맹 측의 비난 성명에 대해 1947년1월 총무원은 즉각 「선리참구원 (선학원) 외 6개 단체 성명서에 대한 경계문」을 내고 승단의 화합을 깨는 대죄를 범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처사는 교내 치안을 교란하여 노대종교인 불교를 파멸시키려는 계획적 음모가 잠재해 있는 만큼 교사이래 초유의 일대 반교도들인 이들을 하루 속히 수술해서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총무원은 강경한 태도로 나왔는데 그 첫 조치가 혁신 연맹의 몇사람이 공산주의자임을 기회로 선학원을 공산주의자들의 소굴로 몰아 선학원을 없애자는 것이었으며 혁신 연맹에 관계하는 사람 전부를 좌익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었다. 이때 몇사람은 경찰에 불려가 주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맡아 가지고 있던 박문사 동본원사 서본원사 화광교원 용곡대학 등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의 재산을 내놓게 했다. 선학원에 주기로 한 본원사를 주지 않은 것도 사실 총무원의 보복조처라 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일본 불교 재산이란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 많은 재산을 빼앗은 총무원은 제대로 간수하기는커녕 뒤에 총무원 측 인사들 개인이 팔아서 착복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총무원 간부들 사이에 독직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는데 소위 광복 사업을 추진한다고 모금한 1백80여만원은 그 용처가 분명치 않았고 전재 동포를 원호한다는 구실 아래 부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1948년4월 종정 박한영 스님이 전북 내장사에서 입적한 뒤, 오래지 않아서는 총무원간부 유모 스님의 40만원 부정 사건이 알려졌는데 이러한 사태로 해서 선학원이나 혁신 연맹의 비난을 총무원은 면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선학원은 그러한 총무원만이 아니고 전체 대처승 정화의 기운을 키워가고 있었다.
박한영 스님의 뒤를 이어 종정에 추대된 송만암 스님은 고불회의 취지를 살려 종명을 조계종이라 하고, 교헌을 종헌으로 바꾸고 새로 제정된 종헌에는 스님이 평소 갖고 있던 뜻을 반영해서 교화승 (대처)과 수행승 (독신)의 구별을 했다.
송만암 스님의 생각은 대처승으로 교화승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찰은 수행승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1951년 이종욱 스님이 총무원장이 되었을 때 그러한 문제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통도사에서 열린 종회에 준하는 회의에서 송만암 스님은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사암은 독신승에게 맡기자고 제의했으며 지금까지 주지를 맡고 있는 교화승은 기득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상좌를 두지 않도록 한다면 교단내의 대처승은 당대에 그칠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비구승 측의 고려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처 측으로서는 현실적으로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으므로 통도사회의는 뚜렷한 결론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이어서 주지와 비구승이 대좌하는 회의가 불국사에서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도 종정 송만암 스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선학원을 주축으로 한 정화의 기운은 송만암 스님의 의견이 완충 역할을 하는 가운데 조금씩 구체화해 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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