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덜 들고 손쉬운 알뜰피서법|자연을 벗한다-한승원(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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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는 더위를 만나러 가지도 않고, 더위를 피하러 가지도 않는다. 언제든지 여름이면 주어진 더위 한복판에서 산다. 참다운 피서는 더위의 한복판에서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미처럼 서늘한 나무 그늘에만 앉아 여름을 살지 않았다. 소먹이며 꼴 베며 풀 거름 장만하며 논·밭에서 김을 매며 살았다. 그러다가 틈이 나는 대로 앞산 너머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때문에 나는 나락·수수·콩·차조·감·밤·상수리·개암 따위가 여름의 뙤약볕 맛을 제대로 보아야 오롯하게 알을 배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여름은 땀 많이 흘리기로 마련된 계절이므로 자연은 거기 대비하여 수분이 많은 수박·오이 따위의 과실을 점지했다.
마땅히 자연의 요구대로 땀을 많이 홀려야 한다.
그래야 땀구멍이 잘 발달되어 겨울철의 감기에 강하게 된다.
땀 흘리기를 무서워하고 귀찮아하면 몸 속에든 더위라는 놈이 발산할 구멍을 찾아 뒹굴어대다가 가슴 한복판에 머무르게 되고 그러면 속이 울렁거리고 환장하게 된다. 그 속 울렁거림과 환장할 것 같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풍기 앞으로 달려가거나 얼음 녹인 음료수를 마시거나「에어컨」을 쐬며 살기만 하는 것은 언 밭에 오줌누기나 콩나물처럼「노랗게 되게」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름난 해수욕장으로 피서랍시고 가본 적이 없다. 소문난 잔치에는 안가야 한다. 가보아야 더욱 뜨겁고 답답한 더위를 먹고 오게 마련이다. 해수욕장이 아닌 조용하고 외딴 고향바다로 가서 있다가 오는 게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몇십 배 이롭다.
하긴 해수욕장을 간다는 것은 발랄한 젊음을 발산하고 싶은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 더위를 피하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이야기가 천번만번 당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해수욕장 오가기의 교통번잡과 터무니없이 뒤집어쓴 바가지와 더러운 물과 더위와 북적거림 속의 피곤과 짜증과 돌아올 때의 허탈을 계산한다면 내 말에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여름의 한 더위 속에서도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꼬박꼬박 써내곤 한다. 그리고 마당이나 골목길을 뛰어다니거나, 엎드려 뻗치기·물구나무서기·줄넘기 따위를 한 다음 아내에게 빨래 감을 한아름 안겨주곤 한다. 그런 다음 목욕탕에 들어가 물을 끼얹어대는 것이다. 땀을 푹 빼고 났을 때의 시원함 위에 물 끼얹는 맛은 무엇에 비유해 말해야 할까.
덥고 답답하면 푸른 산이나 버드나무 숲을 본다. 좀더 시간여유를 얻었을 때, 나는 애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무등산장에 간다. 거길 오가며 맛보는 푸른 바람과 푸른 냄새는「시멘트」벽 속에서 딱딱해졌던 가슴과 혈관을 씻어내 준다.
무등산의 계곡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뼛속까지 얼려주는 듯하다.
거기에 계곡과 푸른 그늘 속을 치달아 오르는 푸른 바람은 나를 살맛 나게 한다.
무등은 내가 항상 자랑하고 싶고, 무엇인가 많이 배우고 싶은 산이다. 내 아들에게도 그 무던하면서도 듬직한 자세를 배우도록 하고싶다.
며칠 전에는 흥길(윤흥길·작가)형이 왔길래 병란(문병란· 인)형님이랑 준태(김준태·시인)랑 함께 가서, 그 무등이 마치 내 듬직한 혈육이라도 된 듯이 자랑을 했었다. 순태(문순태·작가)형하고, 이때껏「시멘트」방 속에서만 사느라고 푸르름에 갈증나 있다면 기숙(송기숙·작가)형님하고, 더러 이 푸른 바람 쐬어가며 이 여름 살아 넘겨야겠다.
이해 들어 나는 가슴의 벽을 헐고 사는 사람들하고 말을 많이 텄다. 이젠 무등하고도 맡을 한번 터볼까 싶다.
나의 더위이기는 길은 가슴 뜨거운 사람과 술잔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이고, 땀 흘리며 소설 쓰는 일이고, 그러다가 틈나면 이렇게 암팡진 듯 우람한 무등의 가슴에서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아들딸에게 무등을 가르치고 제 놈들 아비의 고향바다를 심어주는 일이고, 많은 책을 읽히는 일이다.
나는 내 아이들을 무등처럼 우람하고 듬직하게, 그리고 내 고향바다처럼 맑고 광활하게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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