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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북한선 오징어가 낙지 … UAE는 아랍추장국연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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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요 며칠 동안 강원도 원산에 머물렀습니다. 북한군 로켓발사를 참관하고 동해 절경 명사십리 백사장을 낀 특각(전용별장)에서 가족과 휴양도 즐겼다는 게 대북정보 관계자의 귀띔입니다. 체류 기간 중 김정은은 새로 지은 갈마식료공장을 찾았습니다. 노동신문(6월 29일자)은 “명란젓과 창난젓, 말린 명태와 말린 낙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산물 가공품을 생산하는 현대적인 물고기 생산기지”로 소개합니다.

북한 체신성이 2000년 발행한 우표. 위쪽부터 오징어 사진에 ‘낙지’라는 이름이 학명(學名)과 함께 표기돼 있다. 평양 시내에 등장한 ‘CNC’(컴퓨터수치제어) 관련 선전판으로 김정은의 경제관련 부문 지도력을 부각 소개하고 있다. 북한 스마트폰 ‘아리랑’의 홈 화면으로 유희(게임), 비데오(동영상)등 북한 특유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중앙포토]

 북한 매체가 ‘말린 낙지’라고 일컬은 건 잘 건조된 오징어를 가리킵니다. 오징어를 낙지로 부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 평양에서 발행된 한 장의 우표는 이런 현실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10개의 다리를 가진 잘생긴 오징어 한 마리를 그려넣고 ‘낙지’라는 이름과 학명(學名)까지 적고 있습니다. 1965년 발행된 우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해프닝도 벌어집니다. 회담 취재차 평양 고려호텔을 방문한 우리 기자단이 식당에서 ‘낙지볶음’이란 메뉴를 시켰는데 오징어가 나온 거죠. 잘잘못을 따지던 동료 기자는 여성봉사원으로부터 “선생님, 멀쩡한 낙지를 두고 왜 오징어라고 합네까”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연원을 따져보기 쉽지 않습니다. 오징어와 낙지가 뒤바뀐 모습은 분단 70년을 앞둔 남북한 이질화가 얼마나 심한지 웅변하는 듯합니다.

 일상용어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북한 조선중앙TV도 브라질 월드컵 경기를 한창 중계하고 있는데요, 해외 각국의 호칭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뽈스까(폴란드)·스웨리예(스웨덴) 등은 짐작이나 할 수 있지만 아랍추장국연방(아랍에미리트·UAE) 같은 표기는 어느 국가인지 한참을 더듬어야 합니다. 이산가족 만남 때 우리 상봉단이 당황하는 경우 중 하나가 북측 가족으로부터 “일 없습네다”란 말을 들었을 때라고 합니다. 북한에선 ‘괜찮다’는 뜻으로 통하지만 우리에겐 ‘상관하거나 간섭 말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죠.

 샹들리에를 ‘무리등’으로, 스킨로션을 ‘살결물’로 바꿔 쓰는 등 북한의 우리말 보존 노력은 평가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과거 칫솔공장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새로 개발한 제품에 ‘서리꽃’이란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는 북한 TV 보도를 보며 개인적으로 괜찮은 작명(作名)이라고 느꼈던 적도 있습니다. 하얀 칫솔모를 보며 아마도 김 위원장이 서리꽃을 떠올린 듯합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우리말 표현을 고집해 어색한 경우도 있죠. 인터넷검색(surfing)을 ‘망(網)유람’이라 부르거나 데이터베이스를 ‘자료기지’로 칭하는 등 컴퓨터 관련 용어가 그렇습니다.

 북한은 우리 표준말(서울말)에 대응해 66년 ‘문화어’를 지정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 성지(聖地)로 주장하는 평양을 중심으로 해 언어의 민족적 특성을 보존·발전시키겠다는 취지였죠. 이후 남북한은 각기 표기방식과 표현대로 제 갈 길을 걷게 됩니다. 앞서 정권 수립 직후인 49년엔 한자(漢字)사용을 폐지했습니다. 영어 표현을 쓰지 않고, 노동신문 등 관영매체에 영자표기를 금기시한 것도 체제의 특성을 반영한 겁니다.

 그런데 김정은 시대 들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가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2009년께부터 ‘CNC’란 낯선 영문약자가 부각된 겁니다. 정밀공작기계에 쓰이는 ‘컴퓨터 수치제어’(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를 의미하는 CNC는 김정은의 경제 관련 업적을 띄우려 쓰기 시작했는데요. 길거리 선전포스터 등에 등장한 이 표현은 2010년 1월 1일자 신년 공동사설을 다룬 노동신문에 그대로 실립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 김정은은 이런 행보를 가속화합니다. 새로 건설한 병원을 찾아서는 약국 안내판에 영문표기를 함께 쓰도록 지시하기도 했죠.

 달라진 남북한 언어는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에도 불똥을 튀겼습니다. 무엇보다 자판 배열이 서로 큰 차이가 난 겁니다. 북한 컴퓨터 자판은 특정 단축키(ctrl+I)를 누르면 ‘김일성’이란 글자가 굵게 차별화돼 입력되는 등 유일지배체제의 특성도 드러납니다. 자판 문제는 자음과 모음을 사전에 올리는 순서부터 남북한이 다른 게 이유입니다. 최근 들어 북한에도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전화가 250만 대까지 보급되면서 남북한 자판 통일을 더 늦춰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북한의 대남 비난과 잇따른 도발 위협에도 남북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2006년 착수해 66% 진척률)을 위한 접촉이 지난주 4년 만에 재개된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북한 이름과 고유명사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둘러싼 우리 내부의 공감대도 필요합니다. 새 표기법 합의까지는 남북한이 각기 표기대로 쓴다는 원칙을 정했지만 몇 해 전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언론이나 학계도 노동신문과 ‘로동신문’, 이설주(김정은 부인)와 ‘리설주’를 혼용하고 있죠. 이대로라면 이산상봉 때 남측 아버지 이길동씨가 북측에 두고 온 딸 ‘리춘향’씨를 만나는 게 됩니다. 부녀의 성(姓)이 바뀌는 재앙이 벌어지는 겁니다. 학술 연구 등을 위한 북한 인물·고유명사의 검색에도 큰 혼선이나 번거로움을 초래할 게 뻔합니다. 오징어와 낙지가 제 이름을 찾게 해주고, 남북한 컴퓨터와 휴대전화 자판이 하나로 통합되는 게 ‘착한’ 통일 준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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