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박근혜 대통령과 '여의도 총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만난 구상찬 총영사가 한담(閑談) 도중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징(南京) 시장이 무려 일곱 번이나 면담 약속을 취소하는데….”

 상하이에서 고속철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난징. 한국 기업 금호타이어와 시 정부 간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금호타이어는 주민 진정 등으로 인해 공장 이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난징에 들어왔을 때보다 땅값이 크게 올랐다. 금호타이어는 제 값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나 난징시는 “너네가 잘해서 오른 게 아니니 차익은 우리 몫”이란 셈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구 총영사의 주요 미션이 이런 마찰의 해결이다. 난징 시장을 만나 문제를 풀어보려는데 만나줄 듯하면서 약속을 일곱 번 깨더라는 것이다.

 “여덟 번째엔 무사히 만났느냐”고 물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번엔 약속 한 시간 전에 내가 깨버렸지.”(구 총영사)

 덧붙이길. “30년 (정치) 짬밥’이 있는데….”

 현지 기업인 A씨의 말이다.

 “외교관들은 전부 반대했는데 총영사가 ‘내 식대로 한다’면서 밀어붙였다네요.”

 결과는 어땠을까. 협상은 파투(破鬪) 나지 않았다. 진행형이다. 구 총영사와 난징 시장은 이번주 아홉 번째 약속을 잡았다. 모르긴 몰라도 “박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자가 간단치 않네”라고 생각하고 나오지 않을까.

 A씨가 말을 보탰다. “이번에 보니 외교부 장관, 정치인이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공무원들은 ‘와꾸’대로만 하는데 좀 다릅디다.”

 정치인 외교부 장관도 괜찮을 판에 박 대통령은 왜 정무적 일이 더 많을 국무총리에 여의도 사람들을 멀리할까. ‘총리’ 하면 피로감부터 들지만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날 기자가 구 총영사를 만난 곳은 ‘한·중 문화외교 포럼’에서였다. 구 총영사가 상하이 공공외교협회와 마련한 자리였다. 포럼이 끝난 뒤 상하이 공공외교협회 간부 한 명이 기자에게 “중국은 한국에 관심이 많다”면서 말을 건네왔다. “아, 그런가. 감사하다”고 했더니 다음 말이 이랬다. “한국에서 총리 후보자 두 명이 낙마하고 정홍원 총리가 계속하는 것도 안다.”

 화도 나고 민망했다. 한국의 총리 지명 문제가 어쩌다 해외토픽처럼 됐을까.

여권은 지금 총리 정국의 난맥이 인사청문회 때문인 것처럼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김용준·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가운데 청문회에서 낙마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청문회 문화가 비생산적인 건 맞지만 신상털이가 지나쳐 총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맞는 얘기가 아니다. 총리 하라면 여의도엔 손들 사람이 많다. 총리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정치를 오래한 여의도 사람들이라면 박사논문 쓸 일이 없어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고, 국회의원 하느라 로펌에 다닐 일 없어 전관예우 문제에 해방이란 이유만으로 ‘여의도 총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국가경영을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경장(更張)의 세 시기로 나눴다. 창업은 정권을 여는 것, 수성은 지키는 것, 경장은 개혁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 어떤 시기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박 대통령은 국가개조를 다짐해왔다. 경장의 시기다. 구 총영사처럼 차라리 ‘와꾸’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여의도 총리가 나을 수 있다. 잘만 고르면 말이다. 그런데 국가개조를 다짐하면서 인사는 ‘유임’, 즉 ‘수성’에 힘쓰는 듯하니 메시지가 뒤죽박죽 된 느낌이다.

 율곡은 “수성을 해야 할 때 경장에 힘쓰면 병이 없는데 약을 먹는 격이라 없던 병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반면 “경장을 해야 할 때 수성에 힘쓰면 병에 걸렸는데 약을 물리치고 누워 죽기를 기다리는 격”이라고 봤다.

 지금에야 정 총리가 잘하길 바랄 수밖에 없겠지만 다음 인사 땐 기조를 바꿔야 한다.

 김대중 정부 이후의 역대 대통령들은 ‘당정 분리’라는 이름 아래 여의도와의 인사에 성(城)을 쌓았다. 결과는 ‘당정 분열’로 나타났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가 흥한다는 말, 아직 유효할지 모른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