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절실함을 깡그리 잊은 선수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2002년 6월 14일 대한민국은 최고의 선수 피구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압하고 한·일 월드컵 16강에 진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날 밤 대표팀을 찾았다. 기쁨에 찬 대통령에게 주장 홍명보는 부탁했다. “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 국회의원 146명이 병역법 시행령 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 16일 국방부 대변인은 “국민의 뜻을 고려해 병역혜택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홍명보의 건의 후 면제 결정까지는 이틀이 걸렸다. 박지성·송종국·설기현·이천수·최태욱·차두리·안정환·이영표·현영민·김남일이 수혜자였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16강에서 꺾었다.

 10년 후인 2012년 런던 올림픽. 감독 홍명보가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의 라커룸엔 ‘이등병의 편지(김광석 노래)’가 무한반복 재생됐다. 병역혜택이 가능한 ‘올림픽 3위’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국은 8강에서 주최국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꺾었고, 3·4위전에선 일본을 2-0으로 이겼다. 해외 언론은 “객관적으로 우세한 상대를 잇따라 꺾은 한국의 최대 경쟁력은 병역혜택”이라고 평가했다.

 홍명보는 올림픽 멤버를 그대로 이끌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모든 걸 내던지는 투혼’은 목격되지 않았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 16강 상대였던 우루과이 감독은 “한국의 직설적인 축구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인 한국 대표팀의 근성과 체력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죽하면 나이키는 국가대표 유니폼에 ‘투혼’이라는 한글을 새겨 넣었겠나.

 차범근은 이번 대표팀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은 런던 올림픽 당시 메달이 절실했던 그런 선수들이 아닌데, 홍명보 감독은 그걸 좀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팬들이 가장 섭섭하게 느꼈던 것처럼 우리 선수들에게 월드컵을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그런 절실함이 안 보였던 거죠.”

 동기부여가 안 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가진 돈만으로도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저 유명한 외국 선수들은 왜 저토록 열심히 뛰는가. 그들은 왜 여전히 배고파 보이는가.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경기수당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정부로부터 받은 현금 돈다발에 키스하는 가나 국가대표 선수의 모습은 낯설고 인상적이었다. 대놓고 태업하는 카메룬 선수들은 신기했다. 그들 나라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쩌면 우리의 동기부여를 병역에서 찾으며 신기해하는 해외 언론의 그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이젠 동기부여의 힘을 다른 데서 찾을 때가 됐다.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자신의 필드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명예를 걸고 싸우고,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자부심을 느끼며,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절실하게 뛰는 그런 문화를 키워갈 때가 됐다는 말이다. 그게 힘들다면 ‘우생순(여자 핸드볼 영화)’이라도 단체관람하며 선배들의 애국심이라도 되살리기 바란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