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기업을 春鬪 넘기기 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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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지난해 1천억원 이상의 순이익을 올린 한 대기업은 상여금 문제를 놓고 노조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올해 임단협 교섭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노조 측은 회사가 3천억원안팎의 순익을 올렸지만 상여금을 적게 주기 위해 잠재 부실 등을 모두 반영하는 방법으로 순익 규모를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정상적인 회계처리였다"고 주장하며 1백%의 상여금을 지급했다.이후 3백% 이상의 상여금을 기대했던 노조 측이 크게 반발하자 회사 측은 특별상여금으로 1백50%를 더 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사 간 감정의 골이 깊어져 올해 임단협 교섭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의사 소통의 오해에서 비롯된 불신이 노사협상의 걸림돌이 된 셈이다.

본격적인 춘투(春鬪)를 앞두고 노사간의 탐색전이 한창이다. 특히 올해에는 임금 인상은 물론 노동시간 축소.비정규직 등 제도개선 문제까지 걸려 있어 순조로운 타결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노사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조에 경영정보를 공개하는 등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교섭이 '불신의 벽'에 막히는 최악의 사태는 면하자는 것이다.

◇경영진이 현장으로=아시아나항공은 8일 무작위로 선정한 직원 1백여명과 박찬법 사장 등 최고경영진이 만나는 '오픈 플라자'를 열었다.

직원들은 이날 오전부터 10개조로 나눠 공원 식당 등에서 분임토의를 한 뒤 오후 3시부터 경영진과 대화를 했다.

세시간 동안 이어진 이 자리에서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부터 승무원들을 보호할 대책은 있나" "국내외 항공업계가 이라크 전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경영에는 문제가 없나"는 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2001년부터 분기마다 열고 있는 오픈 플라자는 조종사.정비사.승무원.예약 및 발권 카운터 직원 등 직종이 다양한 항공사의 특성을 감안해 경영진이 현장의 목소리를 들은 뒤 이를 회사 운영에 반영하자는 의도로 만든 제도다. 朴사장은 "직원의 만족이 곧 고객 만족"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부터 매월 사장이 주재하는 경영회의에 노조 대표를 참석토록 한 대우조선해양은 올 상반기 중 현장 직원을 대상으로 경영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기업이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여는 투자설명회(IR)를 직원에게까지 확대해 투명경영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경영정보 공유=노사교섭을 앞두고 자동차업계는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 이라크 전쟁 여파로 판매 부진이 예상돼 긴축경영이 필요하지만 노조의 반발을 우려해 공장 가동률과 판매 목표를 낮출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차판매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지난달 4일 이사회를 노조와 직원에 전면 개방한 것이다. 8명의 이사회 멤버 외에도 관리직.영업직 협의회 대표, 정비직 노조, 전국 5백60개 대리점협의회에서 5명이 참석하게 한 것이다.

의결권은 없었지만 이들이 이사회에 참석한 것은 상장기업으로선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우차판매 이동호 사장은 "노사가 동반자라는 점을 알리고 같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12월부터 80일간 벌어진 파업으로 노사 양측이 깊은 상처를 입었던 데이콤은 지난 2월부터 일찌감치 임단협 협상에 나섰다.

매주 월요일 임단협에는 데이콤 박운서 회장을 비롯, 경영지원 부문장인 김영수 부사장과 경영기획 담당인 김선태 상무가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이현욱 노경협력팀장은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직원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최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애쓰고 있다"며 "매월 경영 실적을 노조에 알려주고 경영위원회와 투자심의위원회에도 참석할 것을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최근 경영권 분쟁을 겪은 한글과 컴퓨터는 대표적인 정보기술(IT)회사답게 노츠(notes)라는 사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전사원과 경영층 간에 대화를 실시하고 있다. 회사 측은 다음달 말까지 확정되지 않은 전략을 제외하고는 경영지표를 모두 노츠에 공개할 예정이다.

골판지 제조업체인 한국수출포장공업도 예상 매출액에서 경영진이 사용하는 경비까지 모두 전직원에게 공개하고 임금협상을 회사 측에 일임해 주도록 노조에 요청할 계획이다.

안용수 상무는 "회사가 모든 것을 보여줘야 타사보다 1%라도 임금을 더 주겠다는 약속을 노조가 믿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동계 움직임은 '정중동'=지금까지 노동현장은 조용한 편이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올 들어 8일까지 발생한 노사분규는 26건으로 지난해 같은기간의 32건보다 감소했다.

쟁의조정 신청도 1백26건으로 1백64건이던 지난해보다 줄었다. 노동부 관계자는 "올해 분규 참가자와 노동손실일은 지난해의 3분의 1 수준"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노조 설립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고 있는 신라호텔처럼 분쟁의 소지는 꺼지지 않은 상황이다. 신라호텔 직원 4명은 지난달 25일 서울지방노동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접수했다가 곧 취소했다.

민주노총 이천호 조직국장은 "노조를 설립했던 직원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또 SK㈜ 노동조합은 8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본사 앞에서 노조와의 단체교섭에 황두열 부회장이 직접 나설 것과 함께 조합원의 자사주 매입을 위한 사측의 지원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노조 측은 "몇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으나 사측에서 책임있는 대표가 참석하지 않아 회사의 경영상황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마찰이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노동계에서는 개별 사업장별 투쟁보다는 ▶주 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한 근로시간 단축문제 ▶비정규직 고용안정 ▶산별교섭 도입 등 법제도 개선 투쟁에 역량을 집중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는 "민주노총이 반전.파병 반대에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노사 문제는 상대적으로 미뤄진 상황"이라며 "노동계에서 새 정부에서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지켜보자는 분위기도 있지만 제도 개선 작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총파업 등 대규모 쟁의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김창우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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