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북한 어선 잇단 표류 … 김정은 '고기잡이 속도전'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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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지난해 12월 ‘8월25일 수산사업소’에 들러 가득 쌓인 냉동생선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북한 주민을 태운 선박이 남쪽으로 표류해 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습니다. 이달 중순 독도 부근에서는 침몰하던 2t짜리 북한 어선에 탔던 5명이 우리 해경선에 극적으로 구조됐습니다. 20~40대 남성인 이들은 모두 북으로 돌아갔죠. 지난달 말에는 울릉도 인근에서 3명이 구조됐습니다. 귀순을 희망한 2명을 빼고 한 명만 판문점을 넘어 귀환했습니다.

 지난해 11월 하순 연평도 근해를 날던 주한미군 헬기는 목선을 타고 떠도는 북한 주민 한 명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상당 시간 바다를 떠돈 그는 위중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함께 탔던 2명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하니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 주민을 살리려 한·미 군 당국은 긴급 작전을 펼쳤습니다. 2011년 아덴만에서 총격을 입은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의 치료를 맡았던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 급히 참여해 목숨을 살렸죠. 이런 대표적 사례 외에 해상에서 긴급구호 조치를 취한 뒤 연료와 식량·식수 등을 실어 북쪽 수역으로 인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위는 지난 4월 여수 앞 공해상에서 침몰한 몽골 선적 북한 선박에 탔다 구조된 주민이 판문점을 거쳐 북송되면서 ‘김정은 만세’를 외치고 있는 장면.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통치 시기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며 염소(아래) 등을 키우라고 장려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진 노동신문]

 왜 이런 일들이 최근 들어 빈번해졌는지 궁금증이 커지던 차에 정부 관계자로부터 그 내막을 귀띔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김정은의 물고기 사랑 때문”이란 겁니다. 귀순 주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러고 보니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부쩍 수산물 생산을 늘리라고 채근한 게 떠오릅니다. 올해 김정은이 처음 공개활동 한 곳도 동해안 원산 지역 수산물 냉동시설입니다. 1월 6일 이곳을 찾아 냉동 처리된 생선이 빼곡한 틈에서 웃음을 보인 그는 물고기 공급에 대한 특별지시를 내립니다. “전국의 육아원(유아원)과 애육원(고아원), 초등 및 중등학원, 양로원에 일년 365일 하루도 번지지(빼먹지) 말고 물고기를 공급하라”는 내용입니다. 최고사령관을 겸한 김정은은 “인민군대가 이 사업을 맡으라”며 군부가 책임질 것을 명령한 겁니다. 김정은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루 일인당 생선 300g을 먹이도록 공급하라고 말했죠. 생선을 많이 먹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들의 하루 섭취량이 100g 수준이라고 하니 좀 과한 목표 제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김정은 방문 이후 이 냉동시설은 ‘1월8일 수산사업소’로 탈바꿈합니다. 최신 선박과 냉동창고, 수백m의 부두 등을 갖춘 현대적 시설입니다. 김정은이 자기 생일을 따 공장 이름을 지은 것에서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4월 30일 조업식을 다룬 이튿날 노동신문은 “최고사령관이 제시한 물고기 잡이 목표를 기어이 수행하는 바다의 어로(漁撈) 결사대가 되자”고 강조합니다. 이쯤 되면 왜 ‘묻지마식’ 출어(出漁)가 이뤄졌고, 엔진 고장과 표류로 이어졌는지 설명이 됩니다. 사실 북한 주민들이 탔던 선박은 1t 미만의 낡은 목선이 대부분입니다. 구조 뒤 선박을 우리 함정에 매달아 예인하다 보면 침수되거나 부서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하는군요.

 구조된 북한 주민은 숙식이 가능한 보안시설에 머물며 관계당국의 조사를 받습니다. 냉전 시기 체제 대결을 하던 때는 귀순을 설득하는 작업도 이뤄졌다고 합니다. 우리 체제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영상·자료를 강제로 보게 하거나, 백화점이나 빌딩 숲을 돌아보도록 한 뒤 북한의 선전이 거짓이란 걸 깨닫게 하는 방식이죠. 하지만 요즘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답니다.

 판문점에서 이뤄지는 주민 북송 절차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군사분계선상에 걸쳐 지어진 중립국감독위 사무실 옆 10㎝ 정도 높이의 콘크리트 경계석 양 옆에서 남북한 연락관이 인적 사항을 확인해 주고받는 식이죠. 북측으로 넘어가기 직전 우리 연락관은 “○○씨, 자유 의사에 따라 돌아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은 “예”라고 나지막이 대답하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부 주민은 경계석에 서서 남측을 향해 “김정은 원수님 만세!”라고 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북측으로 돌아가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과잉 충성을 표해야 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판단해 막지는 않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육류가 부족한 북한에서 물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하게 하려는 노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부터 있었습니다. 94년 7월 김일성 사망 직후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에는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는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토끼와 염소 키우기를 장려한 것인데, 성과를 거두지 못했죠. 외래산 속성 어류인 열대 메기를 대대적으로 공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주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고 실패했죠.

 김정은 집권 이후 몰아친 물고기 열풍에 북한 전역이 떠들썩합니다. 김정은이 최신형 어선 단풍호를 만들도록 한 뒤 연간 어획고가 8배 늘었다는 사연도 등장했습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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