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정신의 생산성」파악의 계기로|제2독립선언문의 의의…이현희<성신여사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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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대한은 당당한 자주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하는 바입니다. 지난 기미년의 독립만세운동은 곧 우리의 부통적인 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것이고 국제정세의 순리에 병진하는 자유·정의·진리의 함성이었읍니다.』

<제2의 자주독립선언문에서>
천도교의 보성사사장이며 기미독립선언서 3만5천장을 두번에 걸쳐 인쇄한 장본인 묵암 이종일이 1922년3윌1일 동지들을 규합하여 재차 항일독립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집요하게 미행하던 일지에 의해 미수에 그친 놀랄만한 사실이 있었다.
그사실의 의미는 3·1운동의 민족운동상의 「추기성」이라는 측면에서 특기돼야할 것같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60주년이 되는 올해 그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고 그 정신과 의의를 현대적으로 조명하여「생산성있는 3·1정신」을 추출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연구를 통해 필자는 독립사상의 원류를 추적·체계화해보았다.
그것을 나는 현실에 대한 비판·반성·자학의 「실학사상」으로 소급해 적용해본다.
17,18세기의 실학사장이 곧 20세기의 독립사상으로 직결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희박하고 개연성에도 미흡하다. 그러나 몇단계로 나누어 연결지을 수는 있겠다.
실학사상은 개항을 전후로한 시기에 외세의 침투에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힘으로서의 개화사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근대지향성·민본적국가건설의욕·부국강병·진보사상·여성의 인간성 회복등 인식체계를 세워 19세기이후 선진사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시기에 대외적진로나 그 방법상에는 성격을 달리하였지만 동학사상이나 척사위정사상계층에도 「민족의 발전」이라는 큰 분류에는 다같이 참여할수있는 문화사적 특성을 전해준 것으로 판단된다.
20세기 일본의 강점하에서의 저항사상인 독립사상은 실학이후 개화·동학·척사위정사상이 인맥·저서·사상론등으로 맥락지어진 것이 아닐까한다.
따라서 독립사상은 실학에서의 근대성·개화성·저항성·개혁성이면면히 시대적 감각과 인맥의 다양성에따라 각분야에 적용, 발전되어 온것으로 보인다.
이가운데 동학사상에서의 개벽성과 개화사상에서의 국민국가건설등 근대의식이 자라는 한편 척사위정사상에서의 민족사 묵수이념이 경술국치(1910년)이후 일본이라는 수준낮고 포학한 혜병·경찰통치에 항거하면서 부국운동의 전형적 저항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구체적으로 연결·태동한것이다.
3·1운동은 1919년을 앞뒤로하여 「섬기성」을 강력히 노출하였다. 즉, 그전에는 민족주의 민중운동으로 동학혁명·의병·대한제국민역회·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광복회·천도교국단등 비밀결사항쟁을 국내외에서 유도하여 민중운동으로 구체화시켰으며 그이후에는 1922년에 개막된 「워싱턴」의 태평양회의를 통해 천도교의 보성사「팀」이 중심이 되어 민중과의 합세와 지지를 호소하여 재차 봉기하려 기도하였었다.
앞에 소개한「임술자주독립선언문」은 보성사「팀」이 주동이 되어 다시한번 민주시민역량을 집결해 보려던 주목할 시위운동의 계획이었다.
민족대표들은 기미년3월에 투옥되었다가 가출옥되었으나 『반도 삼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어』독립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의미있고 중요하다』고 절규하면서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선언한다』는 것을 민중앞에 서슴없이 당당하고 의연한 기백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한때 일본인의 방해를 받았으나 『우리는 일어나야 산다』고 외치면서 지금은 우리가 압박을 받고있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광복하고 말것이니 민중이여 안심하고 경건하게 이번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라』고 간절히 호소하기도 한다.
또 일본을 방축치 못하면 『지금 살고 있는것이 사는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그리고 엄숙히 강조하고『우리의 절대적인 주장은 오로지 독립이 있을 뿐임을명심하라』고 엄숙히 양심의 명령을 전국에 통보하려 계획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오히려 1919년 이후에 더욱 「힘의 부정」으로부터 「역동성있는 독립의 쟁취」정신에 귀착되는 모든 독립운동을 국내외에서 활성화하여 추진하는 저력과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나아가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정통정부를 탄생시켜 권력기구의 사명을 띠게 했으며 1945년까지 지속되는 독립운동의 밑받침이 되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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