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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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l956년11월「멜번」(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렸던 「올림픽」대회장에서 느닷없이「베토벤」교향곡 제9번이 울려 퍼졌다. 그러고 하늘엔 제1차 대전때의 독일국기가 나부꼈다.
100m경기에서 동독선수가 우승, 금「메달」을 받을 때의 장면이다.
동서독은 1955년6월 IOC의 결의에 따라 전독일 단일「팀」을 「올림픽」에 파견하기로했다.
국기는 제1차 대전때의 고전적인 독일국기로. 국가는「베토벤」교향곡으로, 선수선발은 지구의 구별없이 실력대로, 호칭은 독일(저머니) 로-.
이 원칙대로 구성된 단일「팀」의 선수는 3분의2가 서독에서, 나머지가 동독에서 선발되었다. 그 무렵 동독의 「올림픽」위는「베토벤」이 서독출신이라고 시상식에서 그의 교향곡을 거부하는 촌극도 벌였었다.
제17회 「올림픽L (로마) 때에도 똑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례대로 단일「팀」이 구성되었다. 18회 (동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해 우선 예선전을 독일(동서)안에서만 하기로 규정했었다. 양측이 합의할 수 없는 문제는 IOC의 중재를 받았다.
그러나 「멕시코·올림픽」 (68년)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단일「팀」의 밀월은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그 유일한 이유는 동독의 선수· 감독들이 「정치관전」을 일 삼은데 있었다. 선발과정이나 합동연습·경기장 등에서 이들은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떠들어댔다.
서독IOC는 참다못해 최후통첩을 냈다. 『만약 동독이 정치성을 배재하고, 체육친선에 배반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단일「팀」에 참가할 수 없다. 』동서독은 그 동안 2백회의 회담, 5백만 「달러」 의 경비를 들이며 단일「팀」을 유지해 왔었다.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 양독은 교전의 적대감도 없었고 또 이미 명절(크러스머스)때면상호가족방문을 허용해 왔었다. 서신교환은 물론 편법에 따른 교역까지도 10여년을 개속했었다.
단일「팀」구성의 배경엔 이런「자연스러운 관계」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남북한의 경우 l963년1윌「스위스」「로잔」에서 단일「팀」문제로 회동한일이 있었다. 「아리랑」을 국가로 대신하는 것이외에는 모두가 미합의였다.
63년의 「홍콩」회담 (두차례) 도 엮시 그랬다. 북한도 동독처럼 이런 자리가 있을 때 마다 정치 「이슈」 만을 늘어 놓았다.
평양탁구대회를 앞두고 단일「팀」구성을 제의한 그들의 의도는 전례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문제는 동서독과는 그 상황이 다른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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