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67화)재일 한주거 유민족 5·16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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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19직후 민단장에 출마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나는 이듬해인 61년 민단전체대회를 목표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5·16혁명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 나는 동경 상은신용조합 이사장 허필석 씨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그는 선거운동에 열중해있던 나를 만나더니『단장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이유를 물었다. 그런즉 그는『본국에서 군사혁명이 난다는 정보가 있다』고 귀띔했다.
나는 허씨의 말에 며칠동안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결국 계획대로 단장에 출마하기로 단안을 내렸다.
공교롭게도 내가 단장에 당선된 것은 5·16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었다.
단장 당선이 발표된 몇 시간 후 본국으로부터 혁명이 났다는 보도가 날아들었다. 나는 즉시 김광남 중앙의장, 김금석 감찰위원장 등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으나 견해가 구구하여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주일대표부의 엄요섭 공사와 김치순 참사관도 5·16혁명에 대한 민단의 태도표명을 보류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미 생각을 해둔바 있어 즉시 지지성명을 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민단은 나의 주장을 따라 전체대회의 이름으로 5·16 당일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5·16혁명에 대해 지지성명을 낸 것은 아마 민단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무성의 지
지 성명은 이틀 후인 5월18일에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후일 조총련은 내가 5·16혁명 당일에 지지성명을 냈다하여 사전에 내가 혁명세력과 연막을 가졌다고 모략했다. 나 자신도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신통하다는 생각이다.
혁명 후 약 한달 만인 6월 20일쯤 나는 김광남·김금석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우리는「사보이·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4∼5일 동안 바깥출입을 못한 채 기관원들의 주사를 받았다. 아마 이 정권 때 내가 반정부인사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4∼5일이 지나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씨가 찾아 왔다. 김씨는 나에게 그 동안의 경력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약20분 동안 지나간 일들을 솔직이 털어놓았다.
김씨는 내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오늘부터 재일 동포 문제는 치안국에서 정보부로 넘어왔다』고 하면서 내일 박정희 최고회의부회장을 만나라고 말했다.
이튿날 우리는 박부의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유양수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장과 윤태일 서울시장이 배석하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퍽 당돌했던 것 같다. 나는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는 권력을 잡게되면 부패하기가 십중팔구인데 부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 유양수 씨가 기관총을 드르륵 갈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유씨의 그런「제스처」에서 부패를 용납 않겠다는 의지를 보았다.
둘째로 나는 경제자립에 관해 물었다. 경제자립을 하자면 수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나라의 수출은 3천만「달러」밖에 안 된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휘발유 수입대금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 어떻게 경제자립이 가능하겠느냐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에 대해 박부의장은『어려운 일인 줄 안다. 그러나 할대로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세째로 나는 한일관계 정상화에 관한 견해를 물었다. 박부의장은『나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했지만 오늘날까지 기억에 뚜렷이 남는 것은 이 세 가지 물음과 대답이다.
나는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잘 알았습니다』고 말하고『이제부터 같은 배를 타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일본에 돌아온 후 나는 거센 반혁명운동에 시달려 입장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이때 한 약속을 되살리면서 모든 고난을 다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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