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반성하는 오스트리아, 과거 회귀 꿈꾸는 일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0호 12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한 다음 날인 1914년 6월 29일 세르비아 사라예보의 한 도로가 시민 폭동으로 아수라장이 돼 있다. [위키피디아]

100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에서 한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독일·영국·프랑스 등이 잇따라 참전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세계는 지금]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

전사자만 900만 명에 달한 이 전쟁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남았다. 그 여파로 당시 세계의 열강이라 불리던 4개의 제국-오스트리아·독일·러시아·오토만-이 몰락하고 옛 소련에선 공산 소비에트 정권이 탄생했다. 실로 20세기 인류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1차 대전과 관련해 무려 2만5000여 종의 서적이 발간됐다는 사실은 이 전쟁이 인류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올해 초 오스트리아 외교부는 전쟁 발발 100주년을 맞아 전쟁의 원인과 파장을 종합 분석한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특히 이 보고서는 100년 전의 전쟁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현재의 동북아 정세를 1차 대전 발발 직전의 상황에 비유하며 국제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과거 역사를 바라보는 두 나라의 시각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오스트리아의 보고서는 이에 대한 적잖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오스트리아 외교부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올해 초 발간한 연구 보고서 표지.

공격적 민족주의가 낳은 아픔 성찰
보고서는 먼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과도한 민족주의’의 발흥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근대 역사에서 민족주의는 유럽 국가들의 발전을 이끈 견인차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같은 민족주의가 과도하게 발호하면서 공격적 제국주의로 변모하고, 급기야 두 번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제 유럽은 유럽연합(EU)이란 틀 속에서 공격적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EU 통합 과정에서 많은 유럽인은 개별 국가의 국민인 동시에 유럽 시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인권과 시장경제, 민주주의 등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게 되면서 EU 국가 간 전쟁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유럽의 변신은 높은 경제적 상호 의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반목을 거듭하며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에 빠져 있는 동북아 국가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전쟁에 대한 당시의 국민 정서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많은 문인과 화가·지식인은 맹목적 애국주의 열풍에 휩쓸려 앞다퉈 전쟁을 선동했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조차 전쟁을 예찬하는 글을 발표할 정도였다. 여론 지도층이 주도한 이런 민족주의적 감정의 발호는 이내 대중에게 전파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영주와 귀족들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국민의 전쟁’이 돼버린 세계대전은 종전조차 쉽지 않았다. 1917년 조세프 황제 서거 뒤 신임 황제가 왕족 간의 타협을 통해 종전을 시도했지만 승리에 대한 국민적 열망 속에 종전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내 정치적 이유로 공격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다름 없었다. “전쟁을 시작하긴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는 격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 또한 21세기 동북아 국가들이 유념해야 할 점이다.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왜 전쟁을 감행했는지에 대한 분석도 눈길을 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당시 대규모 전쟁을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무엇보다 유럽의 최강국이 된 독일 제국과의 동맹 조약, 특히 전쟁 발발 때의 자동 개입 조항(이른바 ‘백지수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의 개전에 이어 독일과 러시아가 참전했으며, 이는 곧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확대된 전쟁(war of escalation)’의 전형적 형태였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현재의 동북아 정세가 1차 대전 직전의 유럽과 비슷하다며 일본을 당시 영국에, 중국을 당시 독일에 암시적으로 비유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의 경제력이나 글로벌 영향력이 100년 전 영국과 비견될 수 있다고 보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일본이 100년 전 오스트리아 제국처럼 미·일 동맹만 믿고 중국과 우발적 사태 또는 ‘확대된 전쟁’ 상황에 빠져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격적 민족주의와 국제 정세에 대한 자의적 해석은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다.

이 보고서가 더욱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발간된 맥락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자랑거리가 있고 신화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쉽지 않은 게 과거사 문제다. 그런데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됐을까. 해답은 아마도 오스트리아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유럽 최고의 부국이 됐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을 통해 전쟁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사회적 안정과 창조적 경제에 전념해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을 성취했다. 비록 1차 대전 당시 인구 5300만 명의 유럽 최대 제국에서 840만 명의 중소국으로 바뀌긴 했지만 현재 오스트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만7300달러로 세계 6위다. 수도인 빈은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다. 이 같은 자족감은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되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고, 옛 영화를 그리워하되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지 않는 원동력이다.

빈 필하모닉, 28일 사라예보서 기념공연
오스트리아인들은 매년 초 멋진 정장을 차려 입고 수많은 무도회에 나간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무도회는 분명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하지만 이런 무도회를 통해 제국 시대의 영화를 재현해도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이웃 국가는 전혀 없다. 누구도 오스트리아가 옛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이웃의 영토를 넘보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턱시도에 훈장을 패용한 무도객들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객들과는 전혀 다르게 비춰지는 이유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오는 28일 사라예보에서 황태자 서거 100주년 기념공연을 할 계획이다.

동북아시아는 언제쯤 아픈 역사를 평화의 행사로 기념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해국의 통렬한 반성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 동북아 국가들 모두 민족주의가 배타적 국수주의로 변모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유럽 국가들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별로 꾸준히 협력을 추진하는 것도 필수다. 더디더라도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게 과거를 극복하고 번영의 미래를 여는 길이며, 이것이 동북아가 1차 대전 100주년을 맞는 유럽에서 읽어내야 할 숨은 메시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