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경제사] 서역과 손잡고 흉노 협공 漢 무제 구상, 실크로드 낳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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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호 20면

그림1. 『장건출사서역도』 , 둔황 막고굴 323굴 북벽. 한(漢)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張騫) 사절단의 모습을 그렸다.

장건이 서역으로 떠난 것은 기원전 139년이었고 2차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기원전 115년이었다. 이 시기에 장건은 불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에 탄생해 기원전 483년께에 입적했다. 불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중 하나가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방을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서 동진해 중국에 이르고, 이어서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진 경로다. 이를 따라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정확한 시점은 서력기원 직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따라서 적어도 한 무제가 불교를 신봉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위의 벽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⑧ 실크로드를 통한 유라시아 동서교류

먼저 장건의 원정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던 진나라는 시황제가 사망한 뒤에 곧 분열되었는데, 이를 다시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워 통일했다. 북방에 흉노라는 막강한 세력이 한나라에 지속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했으므로 초기의 황제들은 흉노에게 비단, 곡물, 화폐 등을 내주고 공주를 흉노에게 출가시키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그런데 7대 황제인 무제는 이런 화친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흉노를 좌우에서 협공하겠다는 계획을 마음에 품고서 과거 흉노에게 쫓겨 서역으로 밀려났던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고자 장건 일행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획은 무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장건은 중간에 흉노에게 붙잡혀 10여 년 동안 억류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을 얻었지만 애초의 임무를 망각하지는 않았다. 장건은 우여곡절 끝에 흉노의 땅을 탈출해 마침내 대월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고, 귀국길에 다시 흉노에게 잡혔다가 재탈출에 성공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원전 119년에는 다시 흉노를 협공할 세력으로 오손(烏孫)과 연합하고자 장건을 파견했으나 이번에도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장건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장건의 보고를 통해 한나라는 서역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 지역 간에 외교적·경제적·문화적 교류가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한에서 서역으로 비단과 같은 재화가 수출되었고, 서역으로 부터 유입된 재화로는 석류, 포도, 상아, 금, 향료, 보석, 그리고 중국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말인 ‘한혈마(汗血馬)’가 있었다. 한의 교역망은 중앙아시아를 지나 로마제국에까지 이르렀다. 로마에서는 한때 비단 수입이 너무 많아 제국의 재정이 압박을 받을 정도였다.

한 무제 시대 이후에도 서역과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후한(後漢)의 무장 반초(班超)는 73년 흉노 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운 후 30년 넘게 서역에 머물면서 정복지를 확대했다. 그는 부하 감영(甘英)을 서쪽으로 파견해 대진(大秦:로마)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다.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감영이 조지국(條支國:시리아)에 이르러 앞에 놓인 큰 바다(지중해)를 건너려 하자 안식(安息:파르티아)의 뱃사공이 만류했다고 한다. 바다가 워낙 험해서 항해하는 데 순풍에도 3개월, 역풍이면 2년이나 걸리며, 재난 위험이 아주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나라와 로마가 직접 교역하게 될 것을 염려해 안식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시 유라시아의 교역로를 누가 통제하느냐가 큰 관심사였으리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세기 중반에는 대진의 황제 안돈(安敦: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신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림2. 인도에서 돌아오는 현장을 묘사한 둔황 103굴의 벽화.
그림3. 둔황석굴에 그려진 예불 드리는 상인 가족.

다시 둔황으로 돌아가 보자. 둔황은 중국 간쑤(甘肅)성의 실크로드 요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둔황은 이미 기원전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전진기지로서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당 왕조까지 유라시아를 잇는 교역과 문화 교류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명사산(鳴砂山) 기슭에 위치한 막고굴은 산비탈에 1000개가 넘는 석굴을 뚫어 조성한 위대한 불교유산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약 500개의 석굴에서 많은 벽화와 경전 등의 불교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라의 혜초(慧超)가 8세기에 인도를 답사하고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막고굴 벽화에서 한 무제는 어떻게 예불을 드리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게 되었을까? 이 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당나라 때인 7~8세기라는 점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융성하던 당나라에서 불심이 깊은 화가가 장건의 이야기를 불교적으로 각색해 벽화를 제작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즉 한 무제의 모습에 경건한 예불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새롭게 불교사적화를 탄생시킨 것이었으리라. 시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이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으므로 역사적 맥락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서유기에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등장하는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奘)이 7세기에 인도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교 경전을 가져온 것도 바로 이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지 않은가. 8세기에 제작된 둔황의 벽화(그림 2)에 현장 일행이 이 길을 걸어 중국으로 향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당대에 실크로드는 상인이 무역을 위해 오가는 교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인, 사절단, 학생 등이 문화를 교류하면서 세계화를 이루어 가는 통로였던 것이다. 특히 상업과 불교는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실크로드 위에서 번영의 꽃을 피웠다.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자 거류지를 건설하고 숙소·시장·창고와 더불어 불교 승려가 지낼 승원(僧院)을 세웠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는 장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은 불교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식을 찾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예불 의식을 치르는 상인 가족을 묘사한 그림 3에서 상업과 불교의 결합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에서 제당에 모셔져 있는 것이 불상이 아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배를 드리는 무제 아래편에 적혀 있는 설명문이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무제가 기원전 120년에 흉노의 군대를 토벌하고 두 개의 금인(金人)을 얻고서는 이를 감천궁(甘泉宮)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곤 했다고 한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불상이 아니라 흉노가 제사를 지낼 때 모시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인이 과연 그림에 묘사된 모습이었는지는 역사가들이 확신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화가가 제천금인에 후대의 종교적 색채를 가미해 불상의 모습으로 재창조했을 수도 있다.

장건의 원정대를 묘사한 둔황의 벽화가 한 무제 당시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요충지 둔황에서 장건으로 상징되는 ‘외교적’ 요소와 불교라는 ‘종교적’ 요소가 결합되어 벽화의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 로마까지 이르는 유라시아 연결로의 발달 과정을 이 벽화는 후대인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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